<황제, 길을 걷다②> 순종 남행은 이토의 정치적 계산이었다
입력 2010.01.16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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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기획특집 - ‘황제, 길을 걷다’ ②> 차가운 겨울의 ´정치 이벤트´
순종과 일본 황태자 다이쇼의 운졍적인 만남도 순행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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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월 7일 순종이 남도지방을 순행(巡幸)하는 역사적인 일이 벌어진다.
순종은 왜 남행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이토 히로부미는 왜 순종과 함께 남행을 하게 된 것일까?
겉으로 드러나 이유는 간단했다. 순종의 순행조서에서도 밝히고 있듯 힘들고 어려운 백성을 직접 살펴보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숨겨진 역사의 진실은 일제의 철저한 정치적 계산 아래 진행된 ‘정치적 이벤트’라고 할 수 있다.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정치적 이벤트’인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순종의 남행과 관련해 다양한 정치적 포석을 두고 있었다.
우선 그는 순종의 남행을 조선에 대한 일제의 보호권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는 효과와 함께 을사늑약으로 악화될 때로 악화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잘 나타난다.
1907년 7월 20일, 고종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 헤이그 특사 사건을 일으킨다. 이 사건으로 고종은 강제 퇴위를 당하게 되고, 순종이 그 뒤를 잇게 된다. 고종과 순종 누구도 참석하지 않은 유령 양위식이었다.
이후 일제는 조선과 법령제정권, 관리임명권, 행정권 및 일본관리의 임명권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일신협약(1907년 7월 24일) 7개항을 체결한다. 같은 해 8월 1일에는 군대해산이 진행된다. 일제는 한일신협약의 부속 조약으로 순종에게 군대해산을 요청하게 되고 이로 인해 각 부대는 시가전을 벌이기도 했다.
영남불교문화연구소 김재원 소장은 “순종의 순행조서에 나와 있는 민심안정 등을 재해석 하면 을사늑약 이후 진행된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이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실제로 순종이 즉위한 뒤 한일신협약이 체결되고 군대 해산 등의 조치가 취해지는 등 일제에 대한 국민적 감정은 나빠질대로 나빠져 있었다”고 말했다.
또 “이 같은 상황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새로운 황제는 순종이며, 대한제국의 보호를 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라며 “이는 곧 악화된 여론을 어느정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을 것으로 풀이된다”고 덧붙였다.
일제는 이 같은 조치를 진행한 뒤 같은 해 8월 27일 순종 황제 즉위식을 갖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의 계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의 황태자였던 다이쇼(大正, 1879~1926, 메이지천황의 셋째아들로 재위기간은 1912~1926)의 답방문제를 두고 순종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것과 이토 히로부미가 황제를 납치한다는 소문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1907년 10월 16일 일본의 다이쇼 황태자가 조선을 방문해 순종을 알현하게 된다.
다이쇼 황태자의 방문은 5일 동안 진행된다. 순종은 인천항을 통해 입국한 다이쇼 황태자를 직접 만나 서울까지 동반한다.
다이쇼는 대한제국에 머무는 동안 경복궁과 창덕궁을 관람하고, 이 자리에 순종은 함께 하면서 극진한 대접을 하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바로 다이쇼 황태자에 대한 예우로 순종이 답방형태로 일본을 직접 방문 해야 한다는 정치적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이토 히로부미로서는 자기 위신을 높이기 위한 더 없이 좋은 기회,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순종 남행의 숨겨진 이유 중 하나다.
순종의 남행은 1908년 12월에 진행 중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완용에게 남행에 대한 의논을 하고, 순종이 이를 수락하도록 권유할 것을 요구했지만 순종이 부왕인 고종과 상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면서 남행은 보류됐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이 밖으로 알려지면서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을 납치해 일본으로 데려가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일본의 함대가 있는 마산이 순종 남행의 종착지라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이 같은 소문은 설득력을 얻어갔고, 1907년 12월 황태자였던 영친왕이 일본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사실상 인질로 붙잡혀 간 점 등이 소문을 사실로 인식하게 만든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황제의 납치라는 소문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라도 순종의 남행을 감행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처럼 순종의 남행은 정치적인 계산 속에서 이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한가지 짚을 것은 당시 다이쇼는 황태자 신분으로 순종을 알현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로부터 꼭 10년 후인 1917년 6월 8일 순종은 황제자리에서 물러난 뒤 황제로 즉위한 다이쇼를 알현하게 된다. 역사는 서로의 입장을 바꿔놓는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었다.
순종이 첫 방문한 며칠 동안 대구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수 많은 환영인파만와 고관대작들만이 그 자리를 지킨 것일까? 아니면 아무도 모르게 그 장면을 보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을까? 순종의 대구방문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은 없었을까? [데일리안 대구경북=최용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