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대가족’은 ‘바나나’다…천만 감독과 연기 마스터가 만났을 때 [홍종선의 명장면㉒]
입력 2024.11.24 09:32
수정 2024.11.24 09:33
영화 ‘대가족’(감독 양우석, 제작 게니우스,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은 바나나다.
# 바나나 중에서도 싱싱함 감도는 노랑 빛깔에 먹음직스럽게 탱탱한 바나나다.
영화는 문 열기 전부터 줄 서는 평양만두집 ‘평만옥’을 배경으로 한다. 평만옥 사장 함무옥(김윤석 분)이 척척 밀가루 반죽하고 굴려 봉을 만들고, 툭툭 떼어 내 만두피를 밀고, 어울렁더울렁 만두소를 골고루 섞은 뒤 만두피에 듬뿍 올려 솜씨 있게 빚으면 군침이 꿀꺽 넘어가는 생만두가 완성된다. 직원들이 가마솥에 쪄서 찬물에 휘이 헹궈내면, 함무옥에 까탈스러운 감별 끝에 “손님 받아라!” 합격의 축포가 터지며 ‘대가족’이 본격적으로 출발한다.
만둣국, 찐만두, 녹두빈대떡만 팔지만, 정성 다한 만두 하나에 400원만 남길 만큼 적정한 가격으로 손님을 맞지만, 따라올 자 없는 기막힌 맛은 박리다매의 기적을 일으켜 함무옥을 빌딩 부자로 만들었다. 빼곡한 빌딩숲 사이 나 홀로 한옥이 빛나는 평만옥에서 맛과 정성을 대접해 얻은 건물들이다.
빌딩 부자면 뭣하나, 1년에 열 번 넘는 제사를 성심으로 모시는 함무옥이건만 정작 나 죽으면 술한 잔 부어줄 후손이 없다. 자식 하나 있으나 의대에 들어갔던 외동아들 문석(이승기 분)은 엄마가 죽은 뒤 후사 없이 절로 들어갔고, 인기 스타 주지스님이 되어 잘만 살고 있다. 불심도 깊어 환속하여 자식을 낳을 일은 없다는 얘기다.
큰 것 4칸, 작은 것 1칸, 휴지까지 아껴 쓰며 살뜰히 살아왔고 직원들에게 맘보 곱게 쓰는 사장이건만. 무슨 업보인지 6·25 한국전쟁 통에 일찍이 부모 잃고 누이동생 들쳐업고 남으로 내려오다 어여쁜 동생마저 잃고 혈혈단신이 되더니, 인생의 마지막도 속세에서는 가족 하나 없이 맞게 되는 것인가, 시름이 깊다.
이때 한 줄기 빛과도 같이, 천주교 보육원의 민국(김시우 분)-민선(윤채나 분) 남매가 주지스님 아니 문석의 자식이라며 평만옥에 찾아와 “할아버지~”라고 부르니 무옥은 세상을 다 얻은 기쁨을 맛본다. 격한 기쁨도 잠시, 이제부터 함무옥의 민국-민선 ‘내 손주 만들기’ 프로젝트가 가동되고 좌충우돌 고난의 과정에서도 무옥은 손주들과 ‘우선 재미있게 놀기’의 행복을 만끽하며 가슴 품이 커간다.
늦깎이 데뷔작 영화 ‘변호인’(2013, 관객 1137만 명)으로 천만 감독이 된 양우석, ‘강철비’ ‘강철비2: 정상회담’ 같은 무게감 있는 작품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코미디도 가능하다고? 일찍이 ‘거북이 달린다’나 ‘남쪽으로 튀어’에서 코믹연기 가능함을 확인시킨 바 있고, 장르 불문 연기 마스터인 김윤석인 줄 알지만 진짜 코미디도 한다고?
감독 양우석이 기둥을 세우고 배우 김윤석이 대들보 역할을 하니 배우 김성령, 이승기, 박수영, 강한나, 심효섭이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서까래로 쓰인다. 어린이 배우 김시우와 윤채나는 잘 지은 한옥 대청에 켜놓은 따스한 등불로 꽁꽁 언 마음을 녹인다.
하하 호호 노랗고 탱탱한 바나나, 가족 만들기 소동극을 넋 놓고 즐기다가 내레이션 대사 하나를 만난다. ‘그 뒤 아버지와 어머니는 열여섯 명을 더…’. 단 한 문장이 가져오는 파급 효과는 매우 크다. 뒤통수를 제대로 한 방 맞고, 울리는 여파 속에서 영화 처음부터 지금 이 대목까지를 빠르게 훑는 나를 발견한다.
영화는 돌연 코미디에서 휴먼 드라마로 장르가 달리 보인다. ‘갑분싸’ 갑작스레 분위기 싸해지는 배신이 아니라 묵직한 반전의 한 방이다. 되짚어보니, 내가 한바탕 ‘노랑 바나나’ 소동극으로만 즐겼을 뿐 ‘대가족’에는 이미 알 굵은 ‘하얀 속살’ 인류애 감동이 내재해 있었다. 맞다, 바나나는 원래 하얗지!
‘그 뒤 아버지와 어머니는 열여섯 명을 더…’로 시작되는 내레이션은 마치 양우석 감독이 ‘대가족’이라는 바나나의 노랑 껍질을 툭 제쳐 주는 역할을 한다. 이내 우리가 이어받아 껍질을 쭉 벗기면, 타이틀 ‘대가족’의 의미가 매직 아이처럼 다르게 떠오르고 부제 ‘about family’의 뜻이 깊게 파고든다. 영화가 작품이 되는 순간이다.
‘와~ 맛있겠는데’ 노랑 옷 입은 채로도 느껴지는 싱싱한 색과 향에 취해 ‘대가족’ 코미디를 즐겨도 좋다. 바나나 껍질을 벗겨 오물오물, 마른오징어처럼 딱딱하지 않아 치아 상하게 할 일 없이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씹어 먹기 편한 질감 속에 더욱 진하게 다가오는 휴먼드라마의 풍미를 되새겨도 좋겠다.
# 영화 ‘대가족’은 바나나 중에서도 1970~80년대 바나나다.
그 시절 바나나는 귀하디귀했다. 열이 오르고 오한에 떨어도 병원 가기 어렵고 약 몇 알로 버티던 그때, 아이가 너무 아파서 밥술도 넘기지 못할 정도가 돼야 바나나를 집에 들였다. 그것도 요즘처럼 다발이 아니라 서너 개 사서, 정성스럽게 까서 접시에 올려 숟가락으로 얇게 토막 내 미음 떠먹이듯 먹이거나 두 손으로 조심스레 쥐고 조금씩 베어 물어 먹었다. 가난하던 시절 바나나는 우리 집 ‘보물’의 쇠한 기력을 급하게 회복시키고 영양 채우는 지금의 링거였고, 비타민 주사였다.
영화 ‘대가족’은 저출산 시대, 타인의 생명을 하찮은 이유로 해하는 묻지 마 살인의 시대에 내미는 바나나이고 처방전이다. 어째서 우리는 점차 아이를 낳지 않게 되었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공동체 구성원의 소중함을 가벼이 여기게 되었을까. 아이를, 생명을 어떠한 마음과 태도로 바라보고 대해야 그들이 아니라 나부터 그리고 우리의 하루하루가 평안하고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영화 ‘대가족’은 심각한 100분 토론이 아니라 추억 어리는 코미디로, 따스한 감동 깃든 드라마로 전한다.
큰 목소리의 주장이 아님에도 공감의 노크 소리를 크게 들어줄 이는 관객인 우리다.
감독 양우석은 작품마다 마치 그 분야 석학이 된 듯 시간을 들인 자료조사와 분석, 철저한 고증을 바탕에 두고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하기로 유명하다. 그런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영화를 구성하는 작은 퍼즐도 모두 그의 계획과 실행 아래 있음을 알게 되고, 이런 연출자의 다음 작품은 또 무엇일까, 궁금증이 인다. 그래서 물었다, 4년 전 인터뷰에서. ‘변호인’으로 시작해 ‘강철비’ 시리즈를 완성한 감독의 차기작이 맞나, 생각하며 기사에 옮겨적었던 얘기인데. 영화 ‘대가족’을 보며 ‘아, 그 말이 이 영화가 됐구나!’ 상기했다. 영화 시작 전에 품은 뜻에서 ‘대가족’을 통해 건네고픈 이야기를 가늠해 보자.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을 보면 대외적으로 남북문제, 북핵 문제가 중요하죠. 대내적으로는 저출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어릴 적만 해도 1년에 100만, 120만 명이 출생했는데 지금은 30만 명이 안 돼요. 한 세대 만에 4분의 1로 줄었어요. 근본적으로 가족에 관한 생각이 달라진 건데, 가족의 핵심이 ‘아기다’에서 ‘나다’로 바뀐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가족 간의 갈등과 애정, 아이는 누가 키워야 하지?의 문제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아이한테 어른은 우주죠, 어느 순간까지는 우주입니다. 어른으로서 해야만 할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 뭐 볼 영화 있나, 살피기만 하고 영화 예매를 주저했던 당신이라면 지금 때가 왔다. 2024년 온 가족이 함께 가장 만족할 영화가 12월 11일 개봉한다. ‘대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