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정년이’와 명곡 ‘그래도 돼’가 함께 전하는 말 [다시 보는 명대사⑬]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입력 2024.10.26 08:03
수정 2024.10.26 08:03

드라마 ‘정년이’에서 윤정년을 연기한 배우 김태리 ⓒ이하 tvN 홈페이지

가을은 역시 문화의 계절인가. 위안을 주는 노래도, 다음 회차가 미치게 기다려지는 드라마도 많은 요즘이다. 그 가운데 비슷한 주제의식을 담은 명언, 인생에 피가 되고 살이 될 조언을 서로 다른 노래와 드라마에서 만났다.


데뷔 56년 가수 조용필의 20집 앨범의 타이틀곡 ‘그래도 돼’, K-팝의 오늘이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님을 확인시키며 국극의 그 뿌리를 보여주는 드라마 ‘정년이’에서다.


조용필은 1968년 데뷔 이래 단일앨범 첫 100만 장 돌파, 누적앨범 1000만 장의 기록을 세우는가 하면 쉼 없는 도전 정신과 완벽주의로 일본에서도 정상을 차지하고 미국 카네기홀 등에서 한국 가수 최초의 공연을 이뤄내기도 했다. 지난 2013년, 60대 가수의 노래들이라고는 믿기 힘든 ‘바운스’ ‘헬로’ 등을 담은 19집을 발표해 전 세대를 아우르는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2024년, 총 7곡을 담은 명반을 공개하며 여전히 ‘현재진행형’ 최고의 뮤지션임을 각인시켰다. 2022년과 2023년 한 번에 두 곡씩 20집으로 가는 서곡을 선보였던 것에 ‘그래도 돼’ ‘타이밍’ ‘왜’ 세 곡을 보탰는데. 나이를 잊게 하는 고운 목소리에 청량한 발성이 놀라움을 안기고 팝과 록, 일레트로닉 등 다양한 장르와 고도의 연주 실력으로 ‘가왕’이란 무엇인가를 음악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생 캐릭터 문옥경을 만난 배우 정은채 ⓒ

tvN드라마 ‘정년이’(연출 정지인, 극본 최효비, 제작 스튜디오드래곤·스튜디오N·매니지먼트mmm·앤피오엔터테인먼트)는 동명의 원작 만화를 바탕으로, 1948년 뜻을 같이한 30여 명의 여성 국악인이 판소리나 설화 등의 이야기를 노래·춤·연기·음악이 한데 어우러진 새로운 종합예술 탄생시킨 국극과 그 주역들의 매력을 실감 나게 재현했다.


실제로 1948년 춘향전을 바탕으로 한 ‘옥중화’를 시작으로, 이듬해 푸치니의 뮤지컬 ‘투란도트’를 각색한 ‘햇님과 달님’(당시엔 ‘햇님’이 표준어, 현재는 ‘해님’)으로 전국적 인기를 누렸던 국극. 작품성 면에서는 ‘K-뮤지컬의 원조’라 할 만하고, 두꺼운 팬층을 형성한 측면에서는 요즘 아이돌 이상의 인기를 여성 국극인들이 누렸으나 그 명성을 유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가던 국극을 되살리는 데 드라마 한 편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국내 관객만 기립박수를 치는 마음으로 시청하는 게 아니라 디즈니+를 타고 세계인들과 만나며 글로벌 평가 사이트 IMDB에서 회차별 평균 9.4점의 호평 속에 관심이 자라고 있다.

김태리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작품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해내는 배우 ⓒ

공통적 명대사 이전에 조용필과 ‘정년이’에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상상을 넘어서는 노력, 시간을 들여 쏟아부은 피와 땀이 오늘의 찬사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가수 조용필은 바깥 활동에 제한이 있던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고도 집과 스튜디오를 오가며 곡을 듣고 곡을 쓰고 소리와 발성을 연구하는 데에 인생의 시간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만든 노래가 수백 곡이지만 20집에는 단 7곡이 실렸다. 실제로 8곡이 녹음됐지만, 마지막에 본인 성에 차지 않은 한 곡을 뺐다. 숱한 인기곡과 명곡을 세상에 내놓은 그건만, ‘완성했다’는 마음으로 발표한 노래가 없었고 지나서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다고 20집 앨범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소회하기도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계속해서 음악 공부를 하는 조용필의 귀에는 흠결이 포착되나 보다.


‘정년이’의 타이틀롤 윤정년을 연기한 배우 김태리는 출연을 결정하고 3년을 소리 공부에 매진했다고 한다. 시청자가 김태리에게 진짜 소리를 기대할 것도 아니고 얼마든지 그럴싸하게 보일 촬영 수법이 많음에도 극과 캐릭터에 진심을 담고 배우 스스로 자신감을 지니고 연기해야 시청자 눈에 ‘진짜’로 보이는 박진감이 클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김태리뿐 아니라 허영서 역을 연기한 신예은 또한 1년 동안 소리 연습을 했다고 하고, 많은 배우가 한마음 한뜻으로 검술을 익히고 춤을 배우고 노래를 연습했기에 그토록 까다로운 시청자들 눈에도 이토록 감탄이 일렁이는 것이다.


과거엔 명창 채공선, 지금은 정년이 엄마 서용럐 역의 배우 문소리 ⓒ

한참을 돌아 이제야, 두 작품에서 만난 비슷한 느낌의 인생 명언을 적는다.


정년이 엄마 서용례(문소리 분), 젊은 시절엔 채공선이라는 이름의 천재 명창으로 불리웠던 그는 정년이가 어릴 적부터 소리하지 말 것을, 노래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훈육했다. 소리 하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 불살랐건만 남은 것이라곤 한 줌 재밖에 없었던, 힘겹고도 고단한 소리 인생길을 가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


현 매란국극단 단장이자 공선의 어릴 적 친구인 강소복(라미란 분)의 말대로 천재적 소리며 소심줄 같은 고집까지 쏙 빼닮은 정년이는 엄마 눈 피해 장터에서 노래로 손님을 모았고, 국극 남역 스타 문옥경(정은채 분)의 천거로 고향 목포를 떠나 서울로 야반도주했다. 딸을 찾아 상경한 엄마가 부모 자식의 연을 건 요청에도 소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밝고 다부진 캐릭터를 누구보다 잘 소화하는 배우 김태리 ⓒ

정년: 엄니도 소리를 했담서 으째 내가 소리하는 걸 반대하는 거여. 나 같으면 기뻐할 것 같은디. 엄니, 나 돈 많이 벌어 갖고 엄니 호강시켜 주겠단 마음은 그대로여. 근디 인자는 그것뿐만이 아니여. 내가 국극을 하고 싶어


엄마: 벌써 그라고 좋아져 부렀냐.

정년: 응. 사람들이 나헌티 막 박수를 쳐주는디, 아주 막 머리끝까지 쭈뼛쭈뼛 서는 것이, 그 정도로 좋아. 엄니가 나 한 번만 봐주면 안 되겄는가. 나 진짜, 진짜 열심히 할랑게.


엄마: 정년아, 엄니가 이라고 애원한다. 엄니랑 집에 가자, 지발 엄니 말 좀 들어.

(중략)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불싸질러 소리에 다 받쳤는디 남은 것은 한 줌 재밖에 없더란 말이여. 내 꼴 나기 전에 여그서 그만하자.


정년: (엄마를 떨쳐 일어서며) 아니, 나는 엄니랑 달러. 엄니처럼 되지 않을 자신 있어. 엄니가 실패했다고 으째서, 으째서 내 발목까지 잡을라 드냔 말이여.


엄마: 부모 자식 연 끊고 너 없는 자식인셈 칠란다. 그래도 여그 남을 거여, 남을 거냔 말이여!


정년 : 남을라네.


잠시 중심을 잃을 만큼 충격받는 엄마, 일어서서 자리를 뜬다. 뒷모습에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인사하는 정년, 울먹이며 매란국극단을 나서는 엄마.


그래도 돼, 좀 더뎌도 돼, 너 자신을 믿어봐! ⓒ

어른 말씀이면 무조건 듣는 시대는 갔지만 정년이가 불효녀로 보일 수도 있는 대목이다. 누구보다 딸을 아끼는 엄마 용례, 소리 선배 공선의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뒤에 정년이는 매란국극단에서 쫓겨나는 일을 겪는다. 어머니 마음 후벼 파고 택한 길인데, 엉뚱하게 TV 가수 데뷔 준비를 하게 된다. “국극이 하고 싶다”던 정년이지만, 이대로 고향으로 내려갈 수는 없어 고육지책으로 택한 방법이다. 내 인생이, 나의 소리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 막막하고 눈앞이 캄캄할 것이다.


마치, 이런 정년에게 대답을 해 준 것처럼 들렸다, 조용필의 노래 ‘그래도 돼’가 말이다.


앞만 보고 달려왔던 길이

어딜 찾아가고 있는지

까마득히 멀어지는 날들

행여 낯선 곳은 아닐지

어느새 차가운 시선에 간직한 다짐을 놓쳐!


그래도 내 마음은 떠나지 못한 채 아쉬워

이 길에 힘이 겨워도

또 안된다고 말해도

이제는 믿어 믿어봐

자신을 믿어 믿어봐


차오르는 숨을 쏟아내도

떠밀려서 가진 않았지,

내 어깨 위를 누른 삶의 무게

그 또한 나의 선택이었어.

어느새 차가운 바람에 흩어져 버리는 외침!


처음에 가졌던 마음은 그대로

일렁이는데

두 팔을 크게 펼쳐

더 망설이지 않게

이제는 믿어 믿어봐

자신을 믿어 믿어봐

이제는 믿어 믿어봐

자신을 믿어 믿어봐


지금이야 그때

지치고 힘이 들 때면

이쯤에서 쉬어가도 되잖아

그래도 돼, 늦어도 돼

새로운 시작

비바람에, 두려움에

흔들리지 않아!!


모든 캐릭터와 배우가 빛나는 ‘정년이’. 국극처럼 여성 배우들이 주축인 드라마 ⓒ

드라마 ‘정년이’와 노래 ‘그래도 돼’에서 공통적으로 전달받은 인생 격언은 “자신을 믿어, 믿어봐!”였다.


배운 적 없어도 소리를 잘하고 노래하는 게 즐겁고 소리 만큼은 자신 있는 정년이었지만, 막상 매란국극단에서 쫓겨나 대중가수의 길로 접어들었을 때는 ‘이 길이 맞나’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아니, 마음은 자꾸만 국극을 향해 갈 것이다. 아직 증명해내지 못한 자신의 선택이 있지 않은가.


그런 정년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너의 선택을 믿어봐, 아니 너를 믿어봐. 국극이 너의 길이라면 결국엔 그리로 길이 뻗어 나갈 거야. 잠시 샛길로 샜다고 큰일 나지 않아, 조바심내지 마! 라고. 그런데 거짓말처럼 노래 ‘그래도 돼’가 공개됐다. 정년이에게 소리인생 선배가 “그래도 돼, 늦어도 돼. 새로운 인생의 시작, 두려움에 흔들리지 않아!”라고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 같다.


정년아, 소리해도 돼, 그래도 돼. 잠시 또 다른 길로 접어드는 통에 새로운 시작이 더뎌져도 돼, 그래도 돼. 이보다 힘겨운 일도 많았잖아, 두려워하지 말고 너의 선택을, 그 선택을 한 너를 믿어보렴!


4회 마지막에 나온 5회 예고편을 보면, 정년이가 박종국 방송국 PD(김태훈 분)가 원하고 과거의 명가수 패트리샤 김(이미도 분)이 가르친 그 길만 따라갈 것 같지 않다. 정년이 자신을 믿고 ‘사고’를 칠 듯한 느낌이다. 그래, 정년아, 넌 그래도 돼!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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