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실적으로 보여주겠다" 했지만…'내부의 적'에 막힌 반도체 성장판 [기자수첩-산업IT]

조인영 기자 (ciy8100@dailian.co.kr)
입력 2024.08.12 07:00
수정 2024.08.12 07:00

반도체 기업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美 "최첨단 칩 생산 국가" 과시

옆나라 日 '양배추 기적'에도 韓 여야 정쟁 가로막혀 기업 투자 차질

용인 클러스터 조감도. ⓒSK하이닉스

SK하이닉스마저 합류하면서 반도체 중심의 '메이드 인 아메리카' 정책이 정점을 찍고 있다. TSMC, 인텔, 삼성전자, 마이크론 등 내로라하는 반도체 기업들은 모두 미 본토에 첨단 반도체 사업장을 지었거나 짓기로 약속했다. 지나 러몬도 장관이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다양한 반도체 공급망을 갖추게 됐다. 세계 어떤 나라도 최첨단 칩을 생산하는 회사를 두 개 이상 가진 곳이 없다"고 과시할만하다.


보조금이라는 당근을 빌미로 아시아에 쏠린 반도체 제조·소재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려는 미국의 행보는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거침이 없다. 외부의 눈총을 아랑곳하지 않는 미국이 그 어떤 경쟁국 보다 빠르고 크게 결실을 맺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수율 등 영업 기밀에 해당하는 경쟁력 지표를 제출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반도체 기업들이 너도나도 미국에 깃발을 꽂는 것은 AI 분야 빅테크 기업들이 미국에 몰려 있어서다. 제조업 경쟁력 강화를 부르짖는 미 정부의 지원이 확대되면 확대됐지, 축소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도 작용했다.


정부가 보조금을 쏟아내고, 기업들이 투자 보따리를 푸는 미국과 달리 한국의 현실은 초라하기 짝이없다. 메모리 반도체 강국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도 'K칩스법' 하나 통과되는 데 국회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여론의 성화로 부랴부랴 정부가 내놓은 반도체 생태계 지원안에는 보조금이 쏙 빠져, 반쪽 짜리 대책이 아니냐는 푸념이 나왔다.


총선을 앞두고 여·야는 '반도체 규제 원샷 해결', '반도체 메가시티 조성'이라는 그럴싸한 공약으로 표심 잡기에 나서는가 싶더니 제 22대 국회가 열린지 두 달이 넘도록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법 발의가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세제 혜택을 강화하거나, 보조금을 지원하거나, 메모리·시스템 반도체 산업을 강화하자는 법안이 나왔지만 정쟁에 가로막힌탓에 전혀 빛을 보지 못했다.


기업 투자가 빛을 보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SK하이닉스가 2019년 120조원을 투자해 짓겠다고 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공사는 6년째 착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용수·전력 공급 등을 둘러싼 각종 민원과 인허가 문제에 가로막힌 탓이다. 발목을 잡았던 LNG(액화천연가스) 발전소 인허가 문제가 어렵사리 풀리면서 급한 불은 끄게 됐지만, 준공까지 가야할 길은 멀다. 언제 다시 비슷한 문제로 불씨가 번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상존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삼성전자는 노조 리스크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삼성전자 내 최대 노조 조직인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은 조합원에게 200만원 복지포인트를 달라며 사상 첫 파업을 벌였다. 삼성측은 "생산 차질이 없다"고 선을 그었으나 노조는 "생산 차질을 확인했다"며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한국 반도체의 성장판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다. 노조 리스크, 여야 정쟁, 현저히 느린 인프라 조성은 국내 반도체 산업의 활기를 억누를 뿐 아니라 글로벌 경쟁력 도태를 가져올정도로 치명적이다.


대만은 TSMC를 나라를 지키는 신령스러운 산이라는 뜻의 '호국신산'으로 부르며 일본은 "100년에 한 번 있는 기회"라며 구마모토현 양배추 밭을 단 20개 월만에 반도체 클러스터로 탈바꿈시켰다. 반도체 산업이 국가 명운을 바꿀 수 있다는 민·관의 시각이 일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한국은 한 발 떼는 것 자체가 힘들다. 이런 안이한 태도와 속도로는 긴박하게 돌아가는 반도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이제라도 팹 완공·상업생산이 더는 미뤄지는 일이 없도록 각 부처와 지자체는 전방위로 나서야 한다. 상시적으로 이행상황을 점검하는 한편, 규제는 풀고 애로는 청취해 미국, 일본 반도체 투자 속도를 앞서는 저력을 보여야 한다.


최근 파리올림픽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실적으로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현지에서 많은 이들을 만났다는 언급도 했다. 다양한 비즈니스 파트너들과 접촉하며 글로벌 반도체 전쟁에서 힘이 돼줄 외부의 우군을 확보했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젠 내부에서도 우군이 결성돼야 할 차례다. 기업이 아무리 투자를 늘리고, 차세대 기술 연구개발(R&D)에 나서더라도 뒷받침할 인프라와 제도 혁신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국회와 정부는 그동안의 안일함으로 반도체 산업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부채 의식을 갖고 잃어버린 시간까지 보전하겠다는 의지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조인영 기자 (ciy8100@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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