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호가 명장면이다, ‘삼식이 삼촌’의 반응 [홍종선의 명장면⑯]
입력 2024.07.03 13:55
수정 2024.07.03 13:55
‘우리는 하루를 기억하지 못한다. 순간을 기억한다.’
이탈리아 시인 체사레 파베세가 남긴 말이다. 많은 명언이 인용·소개돼 있는 영화 ‘눈부신 세상 끝에서, 너와 나’(감독 브렛 헤일리, 주연 엘르 페닝·저스티스 스미스, 2020)에도 등장한다.
이 말은 영화나 드라마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작품 전체를 온전히 기억하지 못한다, 장면을 기억한다. 영화가 관객의 마음과 뇌리에 오래 남는 데 있어, 영화가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는 데 있어 ‘명장면’이 중요한 까닭이다.
디즈니+ 드라마 ‘삼식이 삼촌’은 관전 포인트가 다양한 작품이다.
드라마를 연출한 신연식 감독의 견해를 빌자면 우리 역사에 있어 한국의 정체성,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정체성을 생성하고 지배하는 데 결정적 시기가 됐던 3번의 계기,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 ‘계유정난’ ‘4·19’. 그 가운데 가장 최근 일인 4·19혁명 전후의 역사를 “옛날에 말이야, 전쟁 중에도 밥 세 끼를 굶기지 않는다는 삼식이 삼촌이 있었는데~”와 같이 삼식이 박두칠, 김산, 강성민, 안기철 등 인물 중심으로 풀어가는 흥미진진 스토리로 들을 수도 있고.
나와 비슷한 인물 한 명을 붙잡고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안으로 들어가 도도한 역사의 흐름과 응축 표현된 변인을 ‘아, 실로 이러했던가!’ 느껴볼 수도 있고. 작가 신연식이 뽑아낸 역사와 인간, 인생과 희망, 사람 관계와 사랑에 관한 촌철살인의 명언들을 되새기며 내 인생에 투영하고 대입해 볼 수도 있다.
필자가 택한 방식은 ‘배우 송강호 즐기기’였다. 클래식, 화면의 색감도 배우들 의상과 말투도 인물들의 사고방식도 고전적인 드라마. 배경마저 1950~60년대여서 ‘저만치’ 떨어져 있는 듯한 작품의 문을 열고 “어서 오세요~” 손님을 맞는 송강호가 보여 얼른 그를 따라 ‘삼식이 삼촌’ 안으로 들어간 영향도 있다.
더욱 중요한 건, 그동안 세상에 나온 배우 송강호의 모든 작품을 봤음에도 ‘내가 배우 송강호를 제대로 알고 있었나? 이이가 이렇게 인물 자체가 되는 메소드 연기를 하는 배우였나?’ 싶을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선명히 파고드는 연기에 감탄이 일어서다.
주목해서 보다 보니, 일전에 기사 ‘삼식이 삼촌’ 송강호를 명배우로 만드는 말끝 발화법 [OTT 내비게이션]을 통해 언급한 바 있듯, 숨죽일 때조차 소리를 뱉어 갑갑함 없는 ‘사이다 발화’를 하는 그가 보이고.
모든 인물에 송강호를 묻혀 연기하는 배우인 줄 알았더니, 워낙 표현력이 좋고 표현법의 개성이 커서 그리 보였을 뿐 누구보다 작품 안으로 들어가 누구보다 그 인물이 되어 살아 움직인 결과 ‘진짜처럼’ 자연스러웠던 것임을 이번에 깨달았다. 오랜 시간 몰라줬던 친구의 마음을 알게 되면 더욱 그 친구에게 집중하게 되듯 세밀히 들여다보니 고개 움직임과 시선 하나, 말의 고저와 장단·속도와 크기에 보는 맛, 듣는 맛이 남다르다. 어찌나 차지게 맛있고 귀에 착착 붙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따라갔다.
이심전심, 사람이 느끼는 건 비슷하다. 네이버 블로거 아톰비트(film1982) 님도 ‘이제야 알았다! 그냥 배우 송강호 자체가 명장면이다’라는 말로 ‘삼식이 삼촌’이 된 배우 송강호를 극찬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16부작 드라마 전체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이 장면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삼식이 삼촌’은 특히 이 장면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11화 엔딩이다.
군사 쿠데타 실패 후 관련자 모두가 감금 조사를 받는 상황. 검은 천으로 눈이 가려진 삼식이 삼촌 박두칠은 같은 공간에 김산(변요한 분)이 있음을 알아챈다.
박두칠 : 장관님, 다시는 못 뵐 줄 알았습니다. 근데 왜 그렇게 고집을 피우셨나. 선우석(김종구 분) 말은 절대 믿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데도 순진하게 국가재건부를 만들겠다고. 끝까지 내 말을 안 들으셨잖아. 그쵸? 장관님, 내 말이 맞죠, 그죠?
김산 : 네. 고집부려서 죄송해요, 삼촌.
박두칠: 하아아! 목소리 들으니까 너무 좋네. 하아….
노래하듯 긴 대사를 한 뒤, 마지막에 깊은숨과 함께 뱉은 말. “목소리 들으니까 너무 좋네”도 기막히게 좋지만, 그 앞뒤 회한과 안도의 숨에서 삼식이 삼촌의 온갖 감정이 느껴진다. 송강호의 명장면은 숨결이면 된다.
어떤 생각과 감정으로 연기했는지 궁금했다. 지난달 24일 서울 삼청로 카페에서 진행된 라운드 인터뷰에서 물었다. 그 장면의 뜻, 그 말에 담긴 삼식이 속마음이 무엇이든 다 필요 없이 배우의 음색과 발화 그에 담긴 감정만으로도 명장면이 된다는 걸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송강호가 명장면이다! 저뿐 아니라 블로거분들도 그리 적고 계시더라고요. 어떻게 준비하셨고 무엇을 표현하려 하셨나요?
“그게 인제 사실은, (군사 쿠데타의 모든 걸 삼식이가 주도했다, 김산은 나를 따르지 않았다는 게) 사실이 아닌데, 삼식이 입장에서 김산이라는 인물, 김산을 살리기 위해서 말을 맞추는 거죠. ‘고집을 피우셨잖아요, 내 말 안 들으셨잖아요’. 그 순간만큼은. 김산은 눈치를 채고 받아들이는 거지요. 장두식(유재명 분) 앞에서, 수사관들 앞에서 그 말을 해야 산이를 살릴 수 있으니까. 아이구 명장면 (무척 쑥스럽다는 표정), 예, 뭐 그런 심정으로 했습니다.”
다시는 못 만나서 말 맞추지 못 하면 어쩌나, 그래서 김산이 죽으면 어쩌나 노심초사 애가 탔을 박두칠. 드디어 만나 선문답 주고받듯 살려낸 김산의 목숨. 그래서 삼식이 삼촌은, 배우 송강호는 그렇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나 보다. 이제 살렸다고 생각하니, 그를 살리는 대가로 본인의 죽음은 목전에 온 것이다 보니, 이제 다시 들을 수 없을 김산의 목소리라 그렇게 애틋했나 보다.
이 장면에는 박두칠의 인간미가 응축돼 있다. 밥이 되는 일이라면, 밥이 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을 해내고 치우는데 할 수 있는 모든 권모술수와 악행을 서슴지 않은 인간. 그러나 삼식이 삼촌은 16부 내내 이름 없는 인물들의 짠한 사정에 눈이 가고 돈을 내주는 사람이었고, 어릴 적부터 같이 지낸 동생 차태민(지형준 분)을 결코 죽일 수 없었고, 자신을 노예처럼 부리는 강성민(이규형 분)에게도 연민을 지니고 있었다. 하물며 그럴 진데. 만일 내가 그토록 가난한 상황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밥 세 끼 먹을 수 있기만 했다면, 되고 싶었던 로망의 인물 김산에 대해서는 오죽했으랴.
“드라마의 배경이 60년대 초, 50년 전이에요. 공감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죠, 현대물도 아니고요. 그러함에도 가치가 있다면 ‘그저 지나간 옛날 얘기다’가 아니라 가상의 옛날 인물을 통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물의 감정, 굉장히 아름답든 추악하든…을 보여주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하나의 가이드 같은 느낌의 드라마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삼식이라는 인물도 그렇게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유연하게 대하려 했던 인물로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OTT(Over The Top, 인터넷TV)의 장점은 공급회사 내에 큰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작품이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어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디즈니+가 400억 원의 제작비를 투입해 신연식 감독 이하 제작진, 송강호 이하 배우진이 공들여 만든 오리지널 작품인 만큼 손을 뻗으면 그곳에 있다.
기왕이면 모든 대사를 사소한 대사 없게 만든, 허투루 표현한 장면 없는 ‘송강호=명장면’이 주는 즐거움을 빠르게 만끽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