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색·라벤더공포 속 ‘길 위의 연인들’ [OTT 내비게이션⑨]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입력 2023.11.28 11:00
수정 2023.11.28 11:00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미국 정치퀴어로맨스


자신들만의 집, Home을 갖기 어려운 길 위의 연인들 ⓒ 이하 파라마운트+ 제공

우리나라 관객은 매우 지적이다. 천체와 우주에 등에 관한 물리학의 현재 지식이 총집약된 것으로 정평이 난 ‘인터스텔라’를 N차 관람하며 즐기고 토론하고 분석하는 소비자다.


티빙에서 볼 수 있는 파라마운트+ 드라마 ‘길 위의 연인들’ 또한 우리의 지적 탐구심을 자극한다. 격정 로맨스, 그것도 우리나라에선 아직 그리 일반적이지 않은 동성 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19금 드라마를 두고 지적 호기심을 말하는 거 맞느냐고? 맞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도 종국엔 지구의 존폐보다 개인의 사랑이 중요함을 일깨우며 사랑함에도 아직 고백도 못 한 연인을 구하기 위해 다시 우주로 향하는 결말을 보여 주듯이. 인류가 중시하시는 보편적 주제 의식인 사랑도 어떤 장르 안에서, 어떤 배경 위에서 얘기되느냐에 따라 그 치정을 속속들이 이해하자면 배경지식이 필요할 때가 있다.


드라마 포스터 ⓒ

현재 5회차까지 공개된 8부작 드라마 ‘길 위의 연인들’은 1952년을 주된 과거로, 1986년을 현재로 한 드라마로 공간적 배경은 미국 정치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이 충돌하는 수도 워싱턴 D.C이다.


시간적 배경을 좀 더 살펴보면, 5회까지 이름만 종종 언급될 뿐 출연한 바 없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집권 시기로.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이 미국에 몰고 온 ‘적색 공포’ 즉 공산주의로부터 미국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수많은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내몰아 전기의자로 직행시키던 시대다.


드라마 ‘길 위의 연인들’은 여기에 매카시가 마찬가지로 국가 안보를 내세워 불러일으킨 또 하나의 공포 정치, ‘라벤더 공포’를 조명한다. 남성 간, 여성 간, 동성애자들을 사회 밖으로 내몰겠다는 폭력적 발상이 불러온 상처들을 상기시킨다.


격동의 시대에 피어난 격정적 사랑. 21세기 현재도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못하는 동성애가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에, 그것도 미국 상원이 정부 내의 동성애자 고용에 대한 조사에 열을 올리던 그때 피어난다.


팀 리플린 역의 배우 조나단 베일리 ⓒ

운명적 사랑의 주인공은 미 국무부에 근무하는 호킨스 풀러(맷 보머 분)와 매카시 아래서 연설문 초안을 쓰는 조수 팀 러플린(조나단 베일리 분)이다. 정확히 말하면, 팀은 첫 만남부터 30년이 넘도록 지속될 운명임을 직감했고, 호킨스는 20여 년이 지나서야 본인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깨닫는다.


팀은 어려서부터 늘 자신이 신부가 되리라 생각하며 살아온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호킨스를 만나면서 성적 정체성뿐 아니라 신과의 관계에 대해 일대 혼란을 겪는다. 그러나 호킨스만 만나면 사고는 정지되고 본능과 순종적 사랑이 극대화되어 ‘호킨스 바라기’가 된다. 끝내 에이즈에 걸려서도 자신의 선택에, 호킨스를 향해 원망이 없다.


서로를 알아본 첫 만남 ⓒ

호킨스는 클로젯 게이다. 고교 시절 아버지에게 테니스 파트너 앞에 무릎 꿇은 장면을 들킨 후, 결코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일에 있어서 철두철미, 하룻밤 상대를 구할 뿐 깊은 관계를 맺지 않고 주도적으로 파트너 위에 군림한다. 매카시의 상원의원 재당선 파티에서 술이 아니라 우유를 애타게 찾던 팀을 발견했을 때도 그랬다. 작문을 잘한다는 그를 매카시 의원실의 막내로 취직시킬 때도 스파이처럼 부릴 요량이었다.


세상일이 그렇게 의도한 대로, 계획한 대로만 되지 않는다. 팀의 순애보에 호킨스의 마음도 흔들린다. 하필 바로 그때, 코끝까지 밀고 들어온 동성애자 색출. 먼저, 호킨스 집무실에서 일하는 메리(앨리스 윌리엄스 분)는 다른 층에 근무하는 연인 캐롤라인과 동거하다 발각되고. 호킨스의 기지로, 메리에 대한 팀의 거짓 러브레터를 증거로 메리와 팀은 생존하고 캐롤라인은 축출된다.


호킨스 풀러 역의 배우 맷 보머 ⓒ

이어, 호킨스의 또 다른 비서가 호킨스를 동성애자로 고발하면서 위기를 맞는다. 증거는 팀이 호킨스에게 선물한 책의 속표지에 적힌 감사의 글. 그러나 잔인할 만큼 뛰어난 호킨스는 거짓말탐지기를 피하는 방법(드라마를 통해 확인해 보면 기가 막히다!)을 발견하고 구현해 자신도 살리고 팀도 살린다.


드라마 ‘길 위의 연인들’이 재미있는 건, 있었을 법한 미국 정부 직원들의 위험천만한 감시와 모략, 동성애를 다뤄서만이 아니다. 실명으로 확인되는 조지프 R. 매카시 상원의원과 오른팔 노릇을 하며 그의 정치적 명망을 키워준 로이 콘 변호사, 행정명령 10450을 통과시키고 서명함으로써 이들이 매카시즘(반공주의)과 라벤더 공포의 칼날을 휘두를 수 있게 힘을 실어준 J. 에드거 후버 FBI 국장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드라마에 버젓이 등장하고 언급된다는 것이다.


가장 힘든 때 찾아오는 가장 행복한 순간 ⓒ

특히 재미있는, 인생의 깊은 맛을 느끼게 하는 대목은 동성애자 색출에 혈안이 된 로이 콘이 데이비드 샤인이라는 동료와 동성애 관계이고, 매카시 역시 한 일병에게 근무지 이동 선처를 조건으로 걸고 항문 성교했으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전력이 있고, 후버 국장 역시 젊은 수사관과 동성애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동성애에 대해 혐오를 지니고 있었단다. 극심한 아이러니다.


드라마에서 보면, 악마의 변호사라 불리는 콘은 샤인이 징집되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한국으로 파병될까 봐 전전긍긍한 나머지 자신의 특별한 파워를 강조하며 징집을 실행하면 “군대를 파괴하겠다”고 협박한 것도 모자라, 징집이 이루어지자 장군도 신지 않을 것 같은 특별한 군화를 샤인에게 맞춰 주도록 압력을 넣는가 하면, 샤인의 생떼에 못 이겨 주말 외박권을 군에 강요하고, 한국 등 전쟁터로 파병되지 않도록 육군 수뇌부를 협박한다.


동성애 시선에서 자유롭기 위해 급히 결혼한 비서이자 아내의 조언으로 콘이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을 감지한 매카시가 축출하려 하지만 콘은 매카시의 동성 섹스 전력을 무기로 맞선다. 역사에서 보면, 결국 두 사람은 결별의 타이밍을 놓치고, 콘의 무리한 갑질이 빌미가 되어 매카시뿐 아니라 후버 국장과 아이젠하워 대통령까지 정치적 위험에 빠트린다.


커밍 아웃 한 두 명배우들의 현실감 넘치는 명연기 ⓒ

다시 호킨스와 팀의 얘기로 돌아가서, 하필. 영화 ‘카사블랑카’(1949)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57)에서 보듯, 전장 속에서 피어난 사랑은 더욱 그 빛이 붉고 아름다운데. 호킨스가 팀이 자신의 인생에서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 깨달기 시작할 때 하필, 미 정부 내에 라벤더공포가 기승을 떨치면서 호킨스 풀러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부모님들 입에서 진작 점지된 대로 루스 스미스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고 결혼한다. 자신의 정치·사회적 생명줄을 연장한 것이다. 동시에 팀은 버려진다.


그렇게 갈 길이 달라진 호킨스와 팀이건만 운명적 사랑의 생명력은 질기고 질겨서 두 사람은 1986년 재회한다. 호킨스가 팀을 찾아간다. 마찬가지로 성적소수자이자 호킨스의 오랜 절친인 기자 마커스 후크(젤라니 알라딘)가 호킨스에게 팀의 에이즈 투병을 알린 뒤다.


30여 년 세월의 변화 속에 머리카락이 희끗희끗 해지고 자식과 손주가 생겼어도, 투병으로 비쩍 마르고 보행이 불편해도, 드디어 바라던 대로 해외(이탈리아 밀라노) 부영사로 발령이 나 감시와 속박의 시선을 벗어날 수 있는 날이 코앞임에도, 도대체 왜 날 떠났는지 이유조차 듣지 못해 원한이 마음속에 켜켜이 쌓였음에도 호킨스와 팀, 팀과 호킨스는 다시 불꽃이 튄다. 사랑이다.


사랑이 사람과 삶에서 의미하는 바, 그 절대성 ⓒ

사랑의 절대성, 우리 인생에서 의미하는 바에 대해 강조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고난과 시련은 그중 하나이고,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에도 사그라지지 않는 사랑을 보며 ‘사랑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금 곱씹는다.


그동안 수많은 시와 소설,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숱한 고난과 시련을 목격해 왔지만, ‘길 위의 연인들’이 보여 주는 그것은 다시 새롭다. 우리는 참으로 어리석어서, 새로운 틀 안에서 무엇을 목격하거나 관찰할 때 그 의미를 더 깊게 또 또렷이 받아들인다. 티빙이 공개한 파라마운트+ 드라마 ‘길 위의 연인들’을 볼 만한 이유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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