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균·정유미 캐스팅이 신의 한 수 [홍종선의 연예단상㉔]
입력 2023.08.31 09:14
수정 2023.08.31 22:52
공포의 근원-인생 연기의 순간을 포착한 영화 ‘잠’
좋은 배우는 작품을 크게 보이게 하는 힘이 있다. 대규모 제작비가 들어가는 블록버스터가 아닐 때, 컴퓨터 그래픽이나 미술과 음악 등 다른 요소의 비중이 작을 때 배우가 작품의 만족도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은 더욱 커진다.
최근 영화 ‘잠’(감독 유재선, 제작 루이스픽쳐스,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을 재미있게 보았다. 수면장애를 소재로 해서 흡사 공포영화 같은 긴장감을 형성하다가 결국엔 인간에게 있어 ‘공포의 근원’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주제 의식으로 본격 변주한다.
그 변주에 맞춰 배우 정유미(수진 역)는 장르를 바꾼다고 할 만큼 변화 폭이 큰 연기를 선보인다. 다소 ‘급발진’으로 보일 수 있는 노선 변경임에도 정유미의 차분하면서도 폭발력 있는 연기 덕에 무리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기괴할 정도로 심각한 남편의 몽유병 앞에서도 무던한 인내심을 보이는 아내일 때, 딸을 지키겠다는 일념에 스스로 괴물이 되어가는 엄마일 때, 어떤 모습일 때도 예뻐 보이는 일이 가능한 건 배우 정유미 자체가 지닌 놀라운 매력 덕이다.
처음엔 제일 문제 있어 보이는 인물이었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로 영화가 흔들리지 않고 운항할 수 있도록 무게중심을 잡는 현수 역은 배우 이선균이 맡았다. 23년 차 배우의 내공이 무엇인지 여실히 확인시키는 탄탄한 연기를 과시한다. 전반의 과한 장면들에서도 표현은 안정돼 있고, 후반에서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보이는 일상 연기는 따스한 온도를 조용히 발산한다. 병을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하는 힘, 우리가 현수를 끝까지 믿게 하는 힘은 이선균에게서 나온다.
이선균-정유미, 이 두 배우의 조합이 참 좋다. 마치 오래 연애하다가 결혼해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오래도록 한 짝꿍처럼 보인다. 뜨겁게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과장된 연기를 들켰네 싶었을 텐데, 사랑이 일상이 되어버린 커플의 신뢰와 잔잔한 스킨십이 현실감을 더한다.
덕분에 전반에 이선균이 달리고, 후반에 정유미가 달리는 설정이 편중돼 있다고 생각되거나 기계적 배분으로 느껴지지 않고. 어느 때는 한쪽이 더 고생하고, 어떤 때는 다른 한쪽이 더 고생하며 ‘평균적 평등’을 이루며 살아가는 조화로운 부부의 삶처럼 다가온다.
정유미-이선균, 두 배우의 하모니와 연기력이 좋다 보니 영화의 낯선 설정이나 과하다 싶은 폭주도 무난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단단한 영화의 바탕 위에서 배우들이 자유로이 뛰어노는 모습이라기보다, 역으로 두 배우가 다져놓은 든든한 기초 위에 ‘잠’이라는 영화가 세워진 느낌이랄까. 아랫집 여자 역의 김국희, 무속인 역의 김금순, 수면클리닉 의사 윤경호도 ‘잠’이라는 집을 함께 짓고 지탱한다.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나서… 생각한다. 작품에서 ‘배우의 힘’이 정말 크구나! 같은 시나리오를 이 배우들이 아닌 다른 출연진으로 촬영했다면 영화가 지금처럼 커 보였을까?
물론 다른 느낌이어도 ‘잠’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재미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정도의 완성도로 지금과 같은 만족감을 주거나 지금 정도의 수작으로 보이기는 어려웠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실험성이 대학생 습작 느낌이 아니라 신선함으로 다가서도록 한 힘, 일부 엉성한 설정이나 이야기 연결을 영화적으로 허용한 자기관용도 높은 연출이 불러온 구멍을 메운 힘…이 배우들에게서 나왔다.
연출 데뷔작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유재선 감독은 ‘좋은 배우들’이라는 크나큰 행운을 얻었다. 물론 인간을 두려움으로 몰아넣는 ‘공포의 근원’을 찾는 익숙한 주제 의식을 수면장애라는 새로운 그릇에 담는 시도, ‘배우가 인생 최고의 절정 연기를 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새로운 틀을 볼 수 있는 시나리오가 스타 배우들, 명배우들을 불러왔으니 감독 스스로 일군 행운이다.
연출 데뷔작이라는 것을 다시 감안할 때, 유재선 감독의 내일이 밝아 보인다. 돈과 시간, 충분한 제작비와 촬영 여건이 주어진다면 그것이 대작이라 할지라도 더욱 매무새 좋은 연출력을 선보이리라 믿는다. 노력만으로 쉽게 얻어지지 않는 개성 강한 색깔은 이미 갖추었고, 이제 자신만의 향이 나는 공기를 작품 안에 채울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