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개혁이 비례대표 늘리기?…정개특위 논의에 우려 커져 [불붙은 게임의 룰 ④]

정도원 기자 (united97@dailian.co.kr)
입력 2023.01.24 01:00
수정 2023.01.23 23:58

공청회 열었더니 '비례 늘리자' 일색

"의원 정수 늘려야…국민 설득하자"

여론은 '어떤 조건에서도 반대' 우세

"정치개혁 '찬물' 끼얹는 주장 우려"

조해진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정치관계법개선소위원장이 지난 19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선거제도 관련 전문가 공청회'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이 신년 인터뷰를 통해 중대선거구제를 던진데 이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를 받아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역제안한데 더해 제왕적 대통령제 극복을 위한 개헌까지 얹는 등 총선을 한 해 앞두고 정치개혁의 논의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먼저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를 통해 개혁안을 마련한 다음, 국회의원 전원이 참여하는 전원위원회를 통해 오는 3월까지 '총선 룰'을 확정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정치개혁의 '마중물' 역할을 해야할 정개특위에서의 논의를 놓고 정치권 안팎의 우려가 커져가고 있다.


국회 정개특위는 설 연휴 직전 선거제도 개편에 관한 공청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교수 일색으로 구성된 패널들은 "비례대표 의석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만 되뇌였다. 심지어 국회의원 정수를 확대해서라도 비례대표 의석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개혁 논의는 국민 여론을 등에 업고 추진돼야 하는데, 국민 여론은 물론 정치현실과도 배치되는 주장이 동력을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형철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교수는 공청회에서 "대표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비례대표 의석 확대가 필요하다"며 "지역구 의석을 줄이는 것은 현역 의원들의 반발로 어려울테니, 의원 정수를 증가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장승진 국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지역구 의석을 줄이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전체 국회의원 정수를 늘리면서 비례대표를 대폭 확대하고, 차라리 국민들에게 의원 수 확대와 비례대표 확대에 대한 필요성을 설득하는 게 더 현실적"이라며 "비례대표 확대를 통해 양당 위주의 정치가 완화되고 국회 내에 안착되면 현재 한국정치가 겪고 있는 여러 문제점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세했다.


문제는 국회의원 정수 확대에 대해서는 국민 여론이 어떠한 조건에서라도 반대가 압도적이라는 점이다. 천지일보가 리서치뷰에 의뢰해 2019년 10월 25~27일 의원 정수 확대에 관해 설문한 결과, 반대가 76.9%였으며 찬성은 19.3%에 그쳤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 국회의 총예산을 묶어두고 의원 정수만 확대하자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KBS 일요진단'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2019년 10월 31일~11월 1일 이같은 주장에 대한 찬반을 물은 결과, 여전히 반대가 65%였으며 찬성은 25%에 불과했다.


심지어 교통방송은 리얼미터에 의뢰해 2018년 11월 7일 '세비와 특권을 대폭 줄이는 것을 전제로 의원 정수를 일부만 확대하는 것은 어떠냐'는, 유도질문에 가까운 설문을 했음에도 반대가 59.9%로 과반이었으며 찬성은 34.1%에 머물렀다.


한 의원실 관계자는 "정치개혁 논의에 불이 붙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책상물림'들이 나타나 '의원 정수를 확대해 비례대표를 늘려야 한다'고 또 주장해대기 시작했다"며 "국민들은 '이러려고 논의를 시작했구나' 싶어 불신과 냉소를 가질 것이다. 막 붙은 불씨에 찬물을 끼얹는 주장"이라고 우려했다.


국민 56.8% "다당제가 적합" 답했지만
정작 지난 총선엔 67.2%가 '꼼수'라는
위성정당에 표 던져…"기존 당 쪼개서
군소당 만드는 것은 양당제만도 못해"


인쇄소 관계자가 지난 2020년 4월 6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인쇄소에서 제21대 국회의원 총선거 투표용지를 확인하고 있다. 2020년 4·15 총선에는 37개 정당이 비례대표 후보를 냈으나, 유권자의 67.2%가 '위성정당 꼼수'라는 융단폭격에도 불구하고 더불어시민당·미래한국당 양당에 표를 던졌다. ⓒ데일리안 홍금표 기자

국민 여론을 역행하면서까지 의원 정수를 늘리고 비례대표 의석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의 논거로는 크게 세 가지가 거론된다. △현행 양당제 대신 다당제를 유도해야 한다는 점 △총선에서 사표를 줄이고 정당득표율에 일치하게끔 비례성을 높여야 한다는 점 △비례대표를 늘려야 우리나라의 정치문화를 쇄신할 수 있다는 점 등이다.


이 중 다당제를 유도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견 국민 여론에 부합해보인다. MBC가 코리아리서치에 의뢰해 설 연휴 직전인 지난 18~19일 설문한 결과에 따르면, 다당제가 적합하다는 국민 여론이 56.8%로 양당제(29.6%)보다 두 배 정도 높았다.


하지만 막연히 '양당 말고 여러 당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관념적인 다당제 선호와 실제 투표는 별개의 문제다. 실제로 유권자가 총선을 맞닥뜨려 기표소에 들어가 찍어야할 '다당'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얘기는 달라진다는 것이다.


지난 20대 국회는 다당제로 운영됐다. 민주당과 자유한국당 외에도 국민의당·바른정당·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민생당 등 많은 원내교섭단체들이 명멸했다. 이외의 원내정당으로도 정의당·민중당·우리공화당·친박신당 등이 있었다.


이들 '다당'들은 2020년 4·15 총선 때 국민의 선택을 받았을까. 우리 국민 67.2%는 더불어시민당과 미래한국당에 표를 던졌다. '위성정당은 꼼수'라며 총선 직전 대대적인 융단폭격이 쏟아졌는데도, 국민들은 정작 대부분 위성정당에 표를 던졌던 것이다.


그외에는 정의당(9.7%)이 봉쇄조항을 넘기는데 그쳤으며, 국민의당(6.8%)와 열린민주당(5.4%)는 추후 거대 양당에 흡수됐다. 민생당(2.7%)·민중당(1.0%)·우리공화당(0.7%)·친박신당(0.5%) 등은 원내정당이었는데도 성과가 미미했다. 기독자유당(1.8%)·새벽당(0.4%)·깨어있는시민당(0.1%)·자유당(0.1%) 등 총선을 앞두고 목소리를 높였던 군소정당들도 마찬가지다.


한 의원실 관계자는 "국민들이 관념적으로는 '다당제를 원한다'지만 막상 표를 줄 당이 없다"며 "거대 양당의 극단적 대립에 신물을 내서 다당제를 원하는 것인데, 정의당·민중당은 민주당보다 더 왼쪽이고 우리공화당·친박신당은 국민의힘보다 더 오른쪽이다. 그나마 양당 사이의 중도를 표방했던 게 민생당이었는데, 지리멸렬한 이합집산과 비례대표 공천 파동을 거치며 대안으로서의 신뢰를 잃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공청회에서 나왔던 문우진 아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발언도 의미심장하다.


문우진 교수는 "다당제를 산출해도 시민사회의 다양한 집단을 대표할 수 있는 정당이 만들어지고 정책 대결을 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라며 "기존 정당 의원들이 당을 쪼개 여러 군소정당을 만들어 기존 정치 엘리트들처럼 똑같이 정쟁하면 양당 체제보다 더 낫다고 보기 어렵다"고 회의감을 토로했다.


'비례성' 되뇌이지만 비례성만 정답?
모든 의석 비례로 뽑는 체코·이스라엘
정국 불안 '신음'…봉쇄조항 높이기도
"현실 보면 양심상 비례 늘리자 못해"


이스라엘 청백동맹의 지지자들이 지난 2019년 4월 9일 22대 총선 개표 직후 환호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지역구 없이 120석 국회 의석 전부를 정당투표에 의한 비례대표로만 뽑고 있지만, 이로 인한 양극단 정당의 난립과 거듭된 연정 붕괴 등으로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4년 연속으로 국회 해산을 거쳐 조기 총선을 실시하고 있다. ⓒ뉴시스

사표를 없애고 비례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 역시, 과연 '비례성'만이 선거제도 개혁 과정에서 추구해야할 지고의 가치인지 검토해볼 필요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이론상 가장 완벽하게 비례성을 구현하는 선거제도는 지역구를 없애고 국회의원 전원을 정당투표에 의한 비례대표로만 선출하며, 사표를 만드는 봉쇄조항도 폐지하는 것이다. 전간기(戰間期) 가장 완벽한 민주주의 제도로 칭송받았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이 취했던 선거제도였지만, 현실은 나치당과 공산당이라는 양 극단 정당이 대두해 중앙당·사민당 등 중도정당들을 흔들어대다가 히틀러의 집권으로 끝장나고 말았다.


이같은 역사의 교훈 때문에 지금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선거제도를 계승한 체코와 이스라엘에서도 의회민주주의를 지키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비례성을 희생하고 사표를 발생시킬 수밖에 없는 봉쇄조항을 두고 있다.


체코의 봉쇄조항은 득표율 5%로, 우리나라(3%)보다 높다. 이스라엘은 1992년 이전까지는 1%였으나, 극단 성향의 군소정당들이 대두하면서 연정 구성을 놓고 중도 정당들이 휘둘리는 일이 빈번해지자, 1.5%(1992년)→2%(2003년)→3.25%(2014년)로 계속해서 봉쇄조항을 높여가고 있는 중이다.


김종철 변호사(현 한국수출입은행 감사)는 지난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열렸던 19대 국회 정개특위 공청회에서 "사표(死票)와 평등의 원칙 등을 일거에 만족시키려면 대한민국 전체를 하나의 선거구로 만들어서 정당득표율대로 다 나누면 되겠지만, 그렇게 구성된 국회를 국민들이 자신들을 대표하는 국회라고 생각하겠느냐"며 "지역을 대표하지 않는 국회의원이라는 것은 국민들이 갖고 있는 관습헌법적 의식에 위배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비례대표를 늘려야 정치문화의 쇄신이 가능하다는 주장도 앞뒤가 바뀌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먼저 정치문화와 정당문화가 바뀌어야, 국민 여론의 지지를 받으며 비례대표를 늘리는 것을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밀실 속에서 행해지는 '깜깜이' 비례대표 공천 과정 △비례대표 의원들의 자질 미달과 각종 구설수 △전문성과 사회적 약자 대변을 핑계로 원내에 진출하지만, 등원하자마자 적당한 지역구를 잡아 재선할 궁리만 하는 문제 등이 지적된다.


김창균 조선일보 논설주간은 같은 19대 국회 정개특위 공청회에서 "비례대표가 정치이론적으로 제대로 작동한다는 전제 하에서는 비례대표를 늘리는 방향이 옳을 수도 있다"면서도 "현실에서 비례대표가 선출되는 방식과 선출된 비례대표의 경쟁력, 그리고 당선되자마자 지역구부터 챙기는 것을 보면 양심상 도저히 비례대표를 늘리자고 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아울러 "20년 동안 정치권을 지켜보니, 지역구는 아무리 당 지도부가 전횡을 한다고 해도 본선에서 떨어질 사람을 밀 수는 없으니 어느 정도의 경쟁력은 담보되더라"며 "비례대표는 발표 하루 전날에도 (공천 명단이) 막 바뀐다. 이것이 정치현실"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21대 국회 정개특위도 공청회를 교수 일색으로 구성된 패널들을 모아서 열 게 아니라, 현실정치에 대해 다양한 시각과 경험을 갖고 있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균형 있게 편성해야 한다는 쓴소리가 나온다.


의원실 관계자는 "독일은 정당법과 선거법에서 비례대표 선출을 당원과 대의원들에 의한 비밀투표로 할 것을 규정하고 있으며, 공천 명단을 선관위에 신고할 때 소집공고와 의사록을 제출하고 비례대표 후보자들이 기본법·정당법·선거법에 따라 민주적으로 선출됐음을 전당대회 의장 외 2명이 선서까지 해야 한다"며 "선서가 잘못됐을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는 형법 조항까지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처럼 비례대표 후보자 명부가 발표하기 전날 밤은 물론 당일 아침까지도 순위가 마구 뒤바뀌고, 최상위 순번을 받은 사람들도 왜 이 순번을 받게 됐는지 본인조차 모르는 상황은 있을 수 없다"며 "최소한 독일 수준으로 정치문화와 정당문화가 쇄신돼야, 그 다음에 비례대표 의석을 늘리자는 논의가 뒤따를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도원 기자 (united97@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