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금융 장악한 기재부 출신들…‘모피아’ 오명에도 꿋꿋
입력 2022.12.13 16:00
수정 2022.12.13 16:01
공공기관 10곳 중 3곳 중앙부처 ‘낙하산’
금융 등 민간 분야 기재부 출신 장악
고위직, 퇴직 이후 자리 마련 급급
전·현직 은밀한 관계가 ‘불공정’ 낳아
#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역할이 커진 신용보증기금 신임 이사장에는 기획재정부 1급 출신 A 씨가 내정됐다. 기재부 기획조정실장과 금융결제원 감사 등을 거친 A 씨는 삼성SRA자산운용 이사회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 기재부 전 차관 B 씨는 최근 가상자산 전문투자회사 대표로 선임됐다. 전임 정부 금융위원회 부위원장과 증권선물위원장을 거친 그는 거시경제와 금융정책에 몸담아 왔다.
# 옛 재정경제부 출신 C 씨는 금융위원회를 거쳐 지난해 예금보험공사 사장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다 지난 9월에는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모피아(MOF+Mafia)’. 퇴임 후 정계나 금융권, 기업 등으로 진출해 산하 단체들을 장악하며 거대한 세력을 구축하는 재무 행정 기관, 즉 기획 재정부 출신 인사들을 마피아에 빗대어 나쁜 의미로 쓰는 말이다.
최근 NH농협금융 회장에 기재부 출신 이석준 전 국무조정실장이 내정되면서 다시 모피아·관피아(관료+마피아)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금융권은 물론 일반 기업과 정치권까지 기재부 출신을 비롯한 전직 관료들이 장악하면서 사회는 물론 공직 전반을 병들게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에 따르면 지난 5년간 기재부 등 경제 관련 8개 부처 퇴직공직자 10명 가운데 8명은 민간기업이나 협회·조합 등에 재취업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실련은 2016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기재부 등 8개 부처에서 취업제한 심사 또는 취업승인 심사를 받은 퇴직공직자 588명의 재취업 현황을 분석한 결과를 지난 3월 발표한 바 있다.
발표에 따르면 전체 588명 가운데 485명(82.5%)은 취업 가능 또는 취업 승인 결정을 받았다. 기재부(96.8%)와 금감원(94.6%), 산업부(92.6%), 금융위(90.9%) 순으로 취업심사 승인 비율이 높았다. 퇴직공직자들은 민간기업(239명)에 가장 많이 진출했고, 협회·조합(122명), 법무·회계·세무법인·기타(각 53명)에도 재취업했다.
다른 통계를 봐도 비슷하다. 공공기관 경영정보시스템 ‘알리오’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350개 공공기관 가운데 주무 부처 출신 기관장 비율은 102곳에 이른다. 10명 중 3명(29.1%)이 주무 부처에서 내려온 관피아인 셈이다.
관피아는 유독 기재부 출신이 많다. 기재부는 산하기관 4곳 모두 기재부 출신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이번에 논란이 된 NH농협금융도 2012년 출범 이후 주로 기재부 출신이 회장 자리를 도맡았다. 역대 회장 7명 가운데 외부 출신은 모두 5명인데, 이 가운데 4명이 기재부 출신이다. 이번에 회장으로 내정된 이석준 국무조정실장을 비롯해 신동규(재정경제부), 임종룡(기재부), 김광수(재정경제부)가 모두 기재부에 몸담았던 인물들이다.
현재 중앙 정부 주요 자리도 기재부 출신이 대거 포진해 있다. 한덕수 국무총리,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김주현 금융위원장, 방문규 국무조정실장 모두 기재부 출신이다. 최근 자리에 오른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도 기재부 재정관리관을 지낸 인물이다.
‘계파’ 만들어 서로 밀고 끌기…정치권 진출도
모피아·관피아 바람은 정치권에서도 강력하다. 지난 6월 치른 지방선거에서 당선한 김동연 경기도지사와 김관영 전북도지사, 육동한 춘천시장, 우범기 전주시장, 윤병태 나주시장, 공영민 고흥군수 등이 모두 기재부 출신이다. 오는 2024년 총선에서도 장·차관 등 퇴직을 앞둔 정부 고위직 차출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모피아·관피아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은퇴한 관료들이 산하 공공기관이나 금융권으로 재취업하면서 현직 고위 관료들과 은밀한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공공의 이익을 추구해야 할 기관들이 전직 관료들의 노후 보금자리로 전락하게 된다. 전·현직 관료들이 서로 공공기관 수장 자리를 물려주고 물려받으면서 기관 관리·감독에 소홀하고 방만·비리 경영에 눈감는 것이다.
권오인 경실련 경제정책국장은 “관피아가 비판받는 이유는 공직에 있는 동안에는 가고자 하는 기업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기도 하고, 정책과 권한을 활용해 갈 곳을 정해 놓거나 새롭게 만들기도 하는 등 공직업무를 공정하게 수행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권 국장 설명처럼 관가에서는 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고위직 공무원들이 자신이 퇴직 후 갈 자리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일각에서는 오랜 공직생활로 쌓은 전문성 등을 퇴직 후에도 활용하는 게 무슨 문제냐고 반론하지만, 그런 기회를 민간 전문가들과 공정하게 경쟁하지 않는다는 게 핵심이다. 심지어 은퇴 전 자신의 자리를 물려받을 후배를 줄 세우며 이른바 ‘라인(계보)’을 만들어 서로 밀고 당기는 병폐까지 생겨나고 있다.
권 국장은 “재취업 후에는 정경유착이나 로비의 창구, 방패막이 역할을 하면서 우리 경제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며 “취업 시장에 있어서도 더 적합한 누군가의 자리를 차지하므로 타인의 취업을 방해함과 동시에 경쟁을 제한한다는 문제도 크다”고 지적했다.
실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2011년 저축은행 사태, 2012년 원전 비리, 2014년 세월호 참사, 2020년 옵티머스 사태 등 대형 사건·사고 이면에는 늘 관피아 문제가 숨어있었다.
김호균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명지대 명예교수)은 “문재인 정부가 관피아의 양적 팽창이었다면 윤석열 정부는 현직 공직자의 정무직공무원으로의 승진뿐만 아니라 민간부문에 재취업했던 퇴직공직자가 최고위 공직자로 재재취업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 이사장은 “공익과 국익을 수호하기 위해 임용된 공직자가 공직을 수행하면서 얻은 정보와 지식은 물론 공직 수행과정에서 형성한 인맥을 퇴직 후에 재활용해 사익을 추구하다가 다시 공익과 국익을 담당하는 공직자로 돌아오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현직 관료가 피감기관에 대한 조사나 감사에서 전직 상관을 마주 대하게 되면 엄정한 처리가 이뤄지기 어렵고 그것이 바로 관피아의 존재 이유”라며 “국가권력을 사유화하는 관피아는 차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