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政商輩(정상배)의 흥정이다
입력 2022.02.21 07:20
수정 2022.02.21 07:20
저쪽하고 깨졌으니 우리하고…
윤 후보, 낙관론에 도취하면 안 돼
안 후보, 미래 지향적 결단 필요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의 단일화 흥정(일방적이긴 했지만)이 깨지기 무섭게 “우리와 거래합시다”라며 튀어 나온 사람이 있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다. “정치인은 없고 정상배만 있다”는 개탄의 소리가 어제 오늘 나온 건 아니다. 대한민국 건국 74년째 이지만 정치의 성숙은 요원하다. 바로 정치한다는 사람들의 저급한 의식과 행태 때문이다. 송 대표의 행태도 갈 데 없는 정상배의 그것이다.
윤-안 단일화가 성사되면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당선을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송 대표는 안 후보가 후보 단일화를 공개적으로 언급하기 이전부터 “안 후보와의 단일화는 열려 있다”고 공공연히 구애를 했다. 단일화가 가능하다고 여겨서 그랬다기보다는 야권 후보 단일화를 훼방 놓겠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때는 그래도 “오죽 애가타면 저런 수법까지 동원할까”해서 이해 해 줄 수 있었다.
저쪽하고 깨졌으니 우리하고…
그런데 안 후보가 윤 후보에 대한 단일화 제안 철회를 선언하자마자 바로 나서서 흥정을 시도한 것은 야비하다 할 정도다.
“이번 선거에서 공학적인 단일화 여부를 넘어 저희가 집권해도 통합정부를 구성하겠다는 자세를 갖고 항상 열려 있다는 말씀을 드린다.”
이런 게 바로 정상배 행태다.
송 대표뿐이 아니다. 이 후보 자신이 이날(20일) 밤 페이스북에 위무의 글을 올렸다.
“안 후보님의 고뇌에 공감한다. 이제 더 나쁜 ‘묻지마 정권교체’를 넘어 더 나은 ‘정치교체’가 되어야 하고, 정치교체가 세상교체 시대교체를 이끌어내게 해야 한다.”
민주당의 제안은 달콤하다. 그러나 안 후보에게도 대등한 기회가 부여되는 단일화는 아니다. 이 후보의 손을 들어 주면 뭐든 다 들어주겠다는 꾐이다. ‘DJP 공동정부’는 한동안 불완전하게나마 작동을 했다. 장담컨대 지금 민주당과의 공동정부 혹은 통합정부는 그 시늉조차도 어렵다. 민주당의 세력이 워낙 비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민주당 측 단일화 제안은 지급이 보증되지 않는 약속어음 혹은 당좌수표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단일화를 통해 민주당이 다시 정권을 잡을 경우, 약속을 파기할 이유를 찾기는 손바닥 뒤집기보다 더 쉽다. 안 후보나 국민의당 선대위 책임자들이 그걸 모를 리 없다. 이 후보와 송 대표도 성사를 기대해서 제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흥정을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그런 판단으로 일단 내지르는 꼼수일 터이다.
사실 민주당으로서는 안 후보와의 단일화로 얻을 게 별로 없다. 안 후보를 지지하는 중도 층이 이 후보 쪽으로 올 것이라는 기대는 안이하다. 오히려 유권자들의 경계심을 유발할 개연성이 더 높다. ‘정권교체’ 지지 여론이 ‘정권연장’의 그것을 크게 웃도는 여론조사 결과가 이어지고 있다. 집권당이 야당의 대선 후보를 ‘통합정부’라는 꿀단지로 꾀어 단일화에 성공할 경우, 되레 정권교체를 희망하는 유권자를 결속시키는 역효과를 초래하기 십상이다.
윤 후보, 낙관론에 도취하면 안 돼
민주당이 기대하는 바는 의외로 간단하고 소박한 것일 수 있다. ‘야권 후보 단일화’가 무산되어 안 후보가 완주하는 게, 민주당으로서는 이상적인 구도다. 안 후보가 결렬을 선언한데 따라 이미 민주당이 원하는 방향으로 선거전이 전개되고 있기는 하지만 윤-안 단일화의 동력이 아주 꺼졌다고 하긴 어렵다. 그러므로 민주당도 계속 미끼를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흥정의 기대 효과는 그뿐이 아니다. 이 과정을 통해 국민의힘과 국민의당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 이미 안 후보는 윤 후보와 국민의힘에 대한 불신과 분노의 감정을 공개적으로 드러내 보였다.
“안 후보가 저런 발표를 하게 된 것은 이준석 대표나 윤석열 후보나, 국민의힘 측에서 안 후보를 모욕하고 모멸한 그런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민주당 송 대표).
이런 식으로 잘만 부추기면 야권 대립과 충돌을 통한 어부지리를 기대할 수 있다. 이게 합리적인 추론이라고 할 때 민주당 지도부의 단일화 흥정은 야비한 정치 술수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국민의힘이 단일화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여 온 것은 안 후보가 완주하더라도 윤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일 것이다. 최근의 대선후보 지지율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그런 판단을 할만도 하다. 단일화를 하면 갚아야 할 빚이 엄청 늘어난다. 이 때문에 당내 유력자들은 안 후보의 결렬 선언에 안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윤 후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이길 가능성이 높다는 정도로는 안 된다. 승리를 낙관할 수 있는 수준에 올라서야 하는 것이다. 당과 선대위에서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은 현재의 구도로도 이길 수 있다는 인식을 윤 후보에게 심어주려고 애쓸 법하다. 위험한 것이 그 점이다.
구인공휴일궤(九仞功虧一簣), ‘아홉 길 산(아주 높은 산)을 쌓는 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공이 한꺼번에 무너진다’는 말이 있다(서경 여오편). 개표 결과가 나오기 전엔 누구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게 선거 결과다. 윤 후보는 당선을 위해서라면 가능한 모든 방법을 궁구하고 동원해야 한다. 주위의 낙관론에 도취하면 그만큼 승리는 멀어진다.
안 후보, 미래 지향적 결단 필요
안 후보의 경우는 여론조사 단일화가 지나친 요구라는 것을 인정해야 옳다. “정권교체를 위해 힘을 합쳐 달라는 여론의 뜻을 받들고자”했다면 합리적 방안으로 단일화를 하겠다는 생각을 할 일이었다. 이제까지의 성적과는 상관없이 단 한 번에 대세를 뒤집겠다고 하는 것은 갬블러의 방식이다. 지지율이 비등한 관계라면 그런 식으로 단일 후보를 정하는 게 바람직할 수 있다. 격차가 나도 너무 나는 상대를 향해 여론조사 한 번으로 승부를 결정짓자는 것은 무리다. 그걸 거절당했다 해서 비난을 퍼부었다. 대인(大人)의 풍모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정권교체의 대의를 위해 단일화 제안을 했는데 상대가 모욕적인 태도를 보이니까 완주하겠다는 것도 명분이 약하다. 느껴지기로 회견문의 기조가 그렇다. “떨어져도 좋다. 끝까지 가고야 만다”는 감정이 행간에서 읽힌다. 결과적으로 민주당 이 후보의 승리를 지원하는 선택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출마를 한 이상 완주하는 게 상식이다. 일부 후보들처럼 출마 자체에 의의를 두고 나선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당연히 당선을 목표로 출마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걸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차선의 선택은 무엇일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만한 대안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게 정권교체라는 대의에 순응하면서 자신의 장래 가능성도 여는 길이 아닐까.
안 후보는 이미 2017년 대선에서 보수·중도세력의 분열로 인한 패배를 경험했다. 당시엔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의 책임 몫도 같거나 비슷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번엔 다르다. 현실을 직시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상대에 대한 불쾌감, 정치인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완주를 고집해 민주당 정권의 연장을 도운 결과가 되고 만다면 자신과 국민의당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대업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 ‘분노’로 진로를 결정하는 일은 없기를 기대한다.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