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 장애인①] 미디어가 담는 다양한 ‘장애’…지워진 ‘장애인’
입력 2021.12.14 13:51
수정 2021.12.14 13:51
“장애인 이아기, 장애인 배우가 하는 게 당연…흉내 낼 수 없는 부분 있다”
“수어 교육을 받았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의외로 잘 맞고 흥미로웠다. 영화에 등장하는 수어는 첫 수업에 다 마스터 했고, 이후 조금 더 진짜처럼 보일 수 있도록 노력했다.”
지난 6월 공개된 티빙 영화 ‘미드나이트’에서 청각장애인 경미 역을 맡은 배우 진기주는 캐릭터를 위해 가장 먼저 수어를 배웠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고, 구화를 사용하며 ‘진짜’ 청각장애인처럼 보이기 위한 노력을 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돌멩이’에서는 김대명이 발달 장애를 가진 캐릭터 석구를 연기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보라매 공원에 있는 한 시설에서 선생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석구를 이해해 나갔다고 연기 과정을 설명했다.
현재 방송 중인 tvN 드라마 ‘지리산’에서는 조난 사고로 두 다리를 못 쓰게 된 서이강(전지현 분)이 휠체어를 타고 등장 중이며, 최근 종영한 MBC 드라마 ‘밥이 되어라’에서는 배우 한정호가 지적 장애를 가진 캐릭터 용구를 표현한 바 있다. KBS2 ‘드라마 스페셜-F20’은 조현병을 소재로 삼았으며, 지난해 방송된 tvN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에는 자폐 스펙트럼과 발달장애 3급의 고기능 자폐를 앓고 있는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 제공한 ‘한눈에 보는 2020 장애인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등록된 장애인 숫자는 261만 명이다. 전체 인구의 5.05%에 이른다. TV 드라마나 영화 속 장애인의 비중은 이 비율과 비교하면 높지 않지만, 최근 사회적 약자 캐릭터를 다양하게 조명하려는 노력이 이뤄지며 장애인의 등장도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장애인을 연기하는 대부분의 배우들은 진지한 접근으로 현실감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다. 진기주, 김대명의 경우처럼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은 물론, 작은 동작, 말투 하나라도 제대로 반영하기 위한 노력도 함께 이뤄진다.
표현에 대한 고민도 동반된다. 한때는 장애를 가진 사람을 비극적으로 그리거나 도구적인 캐릭터로 활용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으나 지금은 장애를 가진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가 하면, 매력적인 인물로도 표현이 되고 있다. ‘사이코지만 괜찮아’를 연출한 박신우 PD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문상태 캐릭터에 대해 “그동안 상태와 같은 캐릭터는 안됐다거나 안쓰럽다는 표현들이 많았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상태를 보면 기분이 좋고 행복하고, 상태에게 많은 매력을 느꼈으면 했다”고 말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계는 존재한다. 비하의 의도는 없었더라도, 장애인들의 입장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잘못된 표현이나 묘사들이 종종 등장하고 있다. 자폐 스펙트럼에 대한 인식개선을 위한 노력을 동반한 ‘사이코지만 괜찮아’도 비하 논란에 휩싸였었다. 극 중에서 문상태를 향해 “뒷머리가 예민한가 봐. 성감대 그런 건가?”, “아 폭탄 스위치. 만지면 펑 터지고 그런 거지?”라는 대사가 쓰여 비판을 받았다.
‘드라마 스페셜-F20’은 조현병을 성급하게 소재로 사용해 지적을 받았다. 조현병 당사자를 비롯한 장애인단체는 아들의 조현병을 숨기고 싶은 엄마 애란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에 대해 “감독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조현병 환자에 대한 자신의 편견과 혐오 공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누군가의 인권을 침해하는 건 ‘창작’이라는 이름의 횡포”라고 호소했다. 장애인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정작 장애인들의 목소리를 배제해 생긴 오류인 셈이다. 다양한 장애를 다루고, 또 장애인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있지만, 정작 현실 속 장애인들은 지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마블 영화 ‘이터널스’에는 여성, 유색인종, 아이대, 성소수자, 청각장애인 등 다수의 약자들이 히어로로 활약했고, 그중 청각장애인 히어로를 실제 청각장애인 배우가 직접 연기했다. 지난 8월 영화 ‘코다’에서도 모든 농인 배역을 실제 농인 배우들이 연기하기도 했다.
수년간 이어진 할리우드의 다양성 추구 움직임이 소재와 표현을 넘어 이를 연기하는 배우들에게까지 확대된 것이다. 표현의 오류를 줄이고, 미디어가 추구하는 다양성을 확대하기 위해선 캐릭터, 소재는 물론 배우 기용에 대한 열린 시선도 필요하다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장애인 배우 6명과 비장애인 배우 7명이 함께 연기했던 장애인 인식 개선 연극 ‘동행: 인생의 소풍’의 한경훈 연출자는 장애인 배우 기용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장애인들의 이야기에 장애인들의 목소리가 들어가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며 “아무리 베테랑 배우가 연기를 하더라도 흉내를 낼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