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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에 아부한다고 체제 존속 가능해질까?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0.10.12 09:00 수정 2020.10.12 08:23

인민이 역사의 전능한 창조자?

위기는 안에서 오는 걸 깨달았나

밤중에 벌인 횃불+함성의 대형 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0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진행된 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 ⓒ조선중앙TV 갈무리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0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진행된 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 ⓒ조선중앙TV 갈무리

김정은의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 연설이 화제다. “고맙다”는 뜻의 표현을 많이 썼다고 해서다. 모두 17번이나 되더라고 동아일보가 보도했다. “민심을 달래는 모습을 연출해 내부 결속을 다지려는 전략의 일환”이라고 이 신문은 평가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기아상태에 놓은 주민들의 생계를 해결해 줄 생각은 않고 김씨 왕조는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등 군비 증강에만 집착해 왔다. 아무리 순치(順治)된 인민이라도 이제쯤은 인내의바닥을 드러낼 법하다. 그걸 김정은도 감지한 모양이다.


인민이 역사의 전능한 창조자?


그 기사를 쓴 기자와 같은 호기심으로 연설문을 들여다봤더니 ‘인민’이라는 표현이 56번이나 쓰였다. 그때마다 예찬 감사 존중 충성맹세 등의 뜻을 담은 레토릭을 앞세우거나 이어달았다. 잔인한 전체주의적 통치자로서는 도저히 구사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그런데 김정은은 거듭 거듭 아끼지 않고, 주저함도 없이 ‘인민’에 아부했다.


“진정 우리 인민들에게 터놓고 싶은 마음속 고백, 마음속 진정은 ≪고맙습니다!≫ 이 한 마디뿐입니다.”

“우리 당에 있어서 인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며 전체 인민이 건재하고 건강해야 당도 있고 국가도 있고….”

“국가가 당하는 어려운 상황을 깊이 리해해 주고 자기 집일처럼 떠맡는 고마운 인민도 이 세상에 우리 인민밖에는 없습니다.”

“언제나 산악같이 일떠서는 인민을 믿고 인민에게 의거하여 모든 국난을 타개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늘 우리 인민들은 우리 당에 고마워했지만 정녕 고마움의 인사를 받으셔야 할 주인들은 바로 위대한 우리 인민입니다.”

“력사의 전능한 창조자인 위대한 우리 인민….”

“하늘 같고 바다 같은 우리 인민의 너무도 크나큰 믿음을 받아 안기만 하면서 언제나 제대로 한번 보답이 따르지 못해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이런 훌륭한 인민을 섬기고 모시고 투쟁하는 것을 무상의 영광으로 간직하겠습니다.”

“나는 우리 인민의 하늘 같은 믿음을 지키는 길에 설사 온몸이 찢기고 부서진다 해도 그 믿음만은 목숨까지 바쳐서라도 무조건 지킬 것이고, 그 믿음에 끝까지 충실할 것을 다시 한 번 이 자리에서 엄숙히 확언합니다.”


위기는 안에서 오는 걸 깨달았나


“끝으로 다시 한 번 전체 인민이 무병 무탈해 주신데 대한 고마움의 인사를 삼가 드립니다.”

“위대한 우리 인민 만세!”


일부만 옮겼는데도 이렇게 많다. 이날의 김정은 연설은 ‘인민찬가’ ‘인민에 대한 충성 맹세문’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어투‧언사는 간곳이 없다.


외세로부터 체제를 지키고 그 위엄을 주민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수십 년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광분했다. 그런데 정작 위기는 내부에서 자라고 부풀어 왔다. 이를 깨달은 것일까? 군주민수(君舟民水), 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공자가어).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집기도 한다. 폭력으로 통치권을 지켜가는 데도 한계가 있다. 공포정치가 일상화하면 그 효과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신형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을 자랑해 봐야 그것으로 자신의 자리와 체제가 지켜질 것은 아니다. 힘자랑을 너무하면 안마당에 적을 불러들일 수 있다. 핵무기 또한 왕조체제 유지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부담을 키운다.


그 황당한 ‘강성대국’의 꿈에서 못 헤어나 주민들의 고통을 강요해 온 결과가 ‘내부적 체제 위기 가중’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민에게 가했던 공포가 자신을 엄습하는 기분을 느끼기 시작한 게 아닐까. 가진 게 많을수록 겁이 많아지고 운신의 폭은 좁아진다. 무엇보다 김정은에겐 왕좌를 이어갈 수 있기를 바라는 자녀가 있다. ‘인민’의 충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권력의 상속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민’에게 아부를 하기로 했을 텐데 아무래도 기대하는 효과가 날 것 같지는 않다.


처음엔 김정은의 그 연설이 주민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연설을 듣는 주민들 가운데 우는 사람이 많았다. 조건반사적 반응이 아니라감격의 눈물을 흘린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인심은 묘한 것이어서 강자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슬슬 만만히 보게 된다. 앞으로 아마도 ‘김정은의 시간’은 그리 녹록치 않을 것이다.


밤중에 벌인 횃불+함성의 대형 쇼


북한의 경제난이 김정은 체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빠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국제사회와 화해하는 쪽을 선택해서 위기를 벗어나는 게 상식적 판단이겠지만 김정은 체제에 기대할 것은 못된다. 핵무기와 미사일을 포기하는 순간 체제는 끝난다고 여기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달라진 건 ‘인민 중시 태도’의 과시 뿐, 다른 행태는 그대로다. 주민의 인내를 유도해서 버티어 내겠다는 심산일 터이다.


“우리의 군사력은 그 누구도 넘보거나 견주지 못할 만큼 발전하고 변했습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거나 맞다들 수 있는 그 어떤 군사적 위협도 충분히 통제 관리할 수 있는 억제력을 갖추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미국 등 국제사회의 반응이 겁나긴 하는지 뻔한 말을 이어 붙인다.


“나는 우리의 군사력이 그 누구를 겨냥하게 되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를 겨냥해서 우리의 전쟁억제력을 키우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핵 및 미사일 무장은 우리의 당연한 자위적 전략이다. 그러니 우리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제재를 풀어!” 이런 뜻이겠다.


거대한 퍼포먼스 습관도 달라지지 않았다. 엄청난 규모의 화려한 쇼를 펼침으로써 인민의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한편 적에게 잘 훈련된 인민의 역량을 과시한다. 이번엔 한밤중에 대규모 군중 쇼를 펼쳤다. 야간 집회의 장중함을 치장하는 것은 불이다. 횃불행진으로 그 효과를 살렸다. 불은 내편을 감성적으로 충동질하면서 상대편에 공포를 안기는 수단이 된다. 거기에 군대의 함성까지 곁들였다. 횃불 효과를 배가시킨 한밤중의 함성, 잘 계산된 연출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촛불혁명’으로 명명한 2016년 가을~17년 봄의 광화문 집회도 말하자면 ‘불 쇼’였다. 거기 횃불부대도 있었다.)


ⓒ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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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위 2020.10.12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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