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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웅을 처음 만나던 날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0.08.19 05:00 수정 2020.08.18 15:18

김원웅, 그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승승장구할 수 있었을까

‘처신의 달인’ 아닌 일반인으로서 상상하기 힘든 묘기, 묘수의 연속

‘교언영색(巧言令色)’에 능하고, 처신의 ‘유연성’ 면에서도 탁월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5일 오전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열린'제74주년 광복절 정부경축식'에서 김원웅 광복회장과 인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5일 오전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열린'제74주년 광복절 정부경축식'에서 김원웅 광복회장과 인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김원웅 광복회장이 연일 서울의 지가를 올리고 있다. 현역 국회의원일 때 보다 ‘화제성’면에서는 발군이다. 그는 우리민족이 해방과 새 출발을 기념하는 날, 그리고 진정한 독립인 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해 온 국민이 합심해 노력해야 할 때, 다시 ‘국민 편가르기’의 선봉에 섰다. 그는 대담하게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역적’이라고 했다. 또 공산 독재국가와 그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한 ‘괴뢰집단’에 맞서 자유대한민국을 지켜낸 백선엽을 사형감이라며 맹공했다. 이정도면 (문재인 대통령도 기념식에서 제창했던 대한민국 국가)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에 대한 폄훼는 귀여운 수준으로 보인다.


이어 그의 과거 발언이 이목을 끌었다. ‘박근혜 보다 김정은이 낫다’는 2년전 발언이었다. 김정은 방남을 환영하는 ‘위인맞이 환영단’ 행사에서 한 말을 들은 국민들은, 그가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북한에 정통성을 두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됐다. ‘현직 광복회장’으로서의 발언으로 너무 이례적이라, 전체 여권의 ‘짜고 치는 전략적 메시지’라는 목소리도 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청와대는 침묵하고 여당에서는 동조하는 발언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당권주자이자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인 이낙연은 “할 말 했다”고 까지 말했다.


메시지가 논란이 될 때는 메신저를 보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언대로 ‘로고스’가 이해되지 않으면 ‘에토스’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김원웅의 발언은 김원웅을 제대로 알 때 분명해진다. ‘왜 그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승승장구할 수 있었을까’를 알면, 그 메시지의 진정성을 확인해 볼 수 있다.


필자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7년 대선 유세장에서였다. 당시 이회창 대선후보의 수행비서였던 필자는 마지막 버스유세를 하며 김 회장을 처음 만났다. 그렇게 비중 있었던 인물이 아니고 스쳐 지나간 정도였지만 워낙 인상적이어서 지금도 기억한다. 당시는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분명해 보일 때였다. 버스를 한대 개조해 전국유세를 돌았다. 하루에 20개 전후의 지역을 돌며 막판유세를 했다. 영남은 뜨거웠고, 호남은 싸늘했고, 충청은 미지근했다. 호남은 상대후보가 DJ였으니 그러려니 했지만, 충청출신 이회창 후보를 충청에서 그렇게 뜨악하게 대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충청출신 JP가 DJ와 연합했다지만, 대통령이 충청출신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차이가 클 텐데 현실에서는 그랬다.


전국 버스유세 중 대전에 도착했다. 당시 이회창 후보는 ‘예비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버스 앞은 장사진이었다. 대전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혼잡한 상황에서 체구도 작은 김원웅 전의원이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회창 후보를 모시고 버스에서 내릴 때 마다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는데 그도 어김없이 그랬다. 주변에 그가 누구냐고 물어봤고 곧 대답을 들었다. 그 대답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사무처 공채’ 선배라고 했다.


필자는 민자당 공채 사무처 당직자였다. 필자가 당에 들어갔을 때는 YS(문민정부) 말기였고 곧 당명은 신한국당이 되었다. 3당 합당으로 공화당이 민자당이 된 후, YS의 상도동계가 당의 요직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공화당 공채출신이었다. 공화당 사무처는 박정희 정권시절 최고의 권력집단이었다. 당시 공화당의 신입 사무처 직원이 지역에 내려가도 시장·군수가 직접 맞았을 정도였다. 그냥 ‘생계를 위한 직장’ 개념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그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했다. 한때는 박정희 정권에 맞서 투쟁을 했으나, 유신시절 공화당 당직자가 되었고, 5공 신군부 전두환 정권의 집권여당인 민정당에서 요직을 지냈다. 그 후,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이 탄생하자, 탈당해 꼬마민주당에 합류한다. 그는 ‘과거를 반성하고 민주화를 위해 일관된 삶을 살았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그의 다음 행보도 그의 말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는 꼬마민주당과 민자당 합당하자, 이회창 총재를 모시고 선거를 치루며 일하다가 공천을 받아 국회에 다시 입성한다.


그의 행보를 보고 사람들은 ‘그의 첫 번째 민정당 탈당도 민주세력으로 귀의한 것이 아닐 것’이고 말한다. 합당과정에서 YS에게 ‘팽(烹)’ 당해, 공화·민정계와 함께 당에서 쫓겨 난 것 아니냐는 관측이다. 당시는 민정계는 대선후보로 이종찬을 밀었고, 상도동 민주계는 YS를 지지했는데, 목숨 건 전쟁과도 같았다고 했다. 그 대선후보 선출결과 수많은 공화·민정계가 밀려났고 상도동 민주계가 실권을 잡았다고 한다. 민정당에서 요직을 맡고 있었던 김 회장에게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전화위복으로 그는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배지를 달았다. 그러나 곧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꼬마민주당으로 다시 총선에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신 것이다. 그리고 바로 태세전환을 시도해, 이회창 총재의 품으로 들어와 다시 국회에 입성했다.


그리고 2002년 대선 때 다시 이회창을 버리고 여당의 노무현 대선후보를 지지했다. 그 공으로 3선 국회의원에 성공해 국회 윤리위원장까지 맡게 된다. ‘처신의 달인’이 아닌 일반인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묘기, 묘수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문재인 정권에서 화려하게 등장한다. 국가적 명예직인 ‘광복회장’이란 위치로 말이다. 독립운동가 선친의 영향력을 잘 활용한 덕분일 것이다.


그의 행적을 볼 때 그는 ‘교언영색(巧言令色)’에 능하고, 처신의 ‘유연성’ 면에서도 탁월한 인물인 것 같다. 그것이 욕먹을 일은 아니다. 오히려 정치인으로서 꼭 필요한 덕목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정치인이고 사회 지도자급인사라면 반드시 더 큰 것이 필요하다. 바로 ‘인(仁)’이다. 여기서 ‘인’은 공자가 말씀하셨듯이 ‘애인(愛人)’을 뜻한다. 타인에 대한 사랑, 국가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그 능력들이 클수록 패악(悖惡)이 될 뿐이다. 그가 다음 정부에서 상황이 바뀌면,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발언에 대해 어떻게 말할지 궁금해진다. 또 ‘반성하고 새출발하겠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게 그의 일관성에 부합할 것 같다. 그의 일관성은 ‘교언영색’과 ‘후흑학(厚黑學)’이지 싶으니 말이다.


얼마 전 막을 내린 “싸이코지만, 괜찮아”라는 드라마가 있다. 그런데 “화제성에 비해 시청률이 높게 나오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필자는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김원웅 회장을 보면서 힌트를 얻었다. 우리국민은 신문에서 매일 싸이코들을 본다. 너무 익숙해서 드라마에서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주 본다고 마냥 괜찮지도 않다. 국민은 더 이상 싸이코 정치인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그 소망이 언제나 이루어질지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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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우석 정치평론가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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