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없인 AI 못 키운다”…젠슨 황 방한의 속내
입력 2026.06.09 13:57
수정 2026.06.09 13:57
4박 5일 방한 마치고 김포공항 통해 출국
작년 깐부 회동 땐 GPU 공급 기대감
올해는 협력 범위 대폭 확대
메모리·클라우드·모빌리티·로보틱스까지 한국 의존도 커져
지난 5일 입국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방한 일정을 마친 뒤 9일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를 통해 출국하며 손을 흔들고 있다.ⓒ연합뉴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4박 5일간의 방한 일정을 마치고 9일 오전 김포공항을 통해 한국을 떠났다. 이번 방한은 지난해 10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함께한 이른바 ‘깐부 회동’ 때와는 분위기가 묘하게 달랐다.
당시만 해도 국내 기업들이 엔비디아의 AI 반도체 생태계에 올라타기 위해 손을 내미는 장면에 주목했다면, 이번에는 엔비디아 역시 한국 기업 없이는 다음 단계의 AI 확장을 완성하기 어렵다는 점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났다는 평가다.
황 CEO는 지난 6일 입국 당시 “한국을 위해 선물을 가져왔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실제 방한 기간 동안 공개된 협력의 반경도 단순한 GPU 공급이나 HBM 구매 논의를 넘어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 SK텔레콤의 AI 클라우드, 네이버의 AI 인프라, 현대차그룹의 모빌리티·로보틱스, LG그룹의 데이터센터·휴머노이드 로봇, 두산의 산업용 로봇까지 엔비디아 생태계가 한국 산업 전반으로 넓어지는 모양새다.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단연 HBM이었다. 황 CEO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만난 자리에서 HBM을 형상화한 과자를 건네받고 “더 많은 HBM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내놓으며 현장 분위기를 띄웠다.
농담처럼 나온 말이었지만, 이면에는 엔비디아의 절박함이 담겨 있다. AI 가속기 성능 경쟁이 심화될수록 GPU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GPU 옆에서 데이터를 초고속으로 공급해주는 HBM이 병목을 풀 핵심 부품으로 떠올랐고, 이 시장의 중심에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익대학교 인근의 삼겹살집에서 기업 총수들과 회동, 잔을 부딪치고 있다. 왼쪽부터 최태원 SK그룹 회장, 젠슨 황 CEO, 이해진 네이버 의장, 구광모 LG그룹 회장ⓒ데일리안 홍금표 기자
이에 지난해 10월 ‘깐부 회동’의 핵심이 국내 기업들의 GPU 확보 기대감이었다면, 올해 방한의 키워드는 상호 의존으로 변화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엔비디아는 여전히 AI 반도체 시장의 절대 강자지만, AI 인프라가 커질수록 필요한 부품과 산업 파트너도 많아졌다. 차세대 AI 가속기에는 더 고성능의 HBM이 필요하고, AI 팩토리에는 통신·데이터센터 사업자가 필요하다.
피지컬 AI와 휴머노이드 로봇을 현실 산업으로 끌고 오려면 완성차, 로봇, 제조 현장을 가진 기업이 필요하다. 이 조건을 동시에 갖춘 국가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한국 기업들의 존재감이 커진 것으로 보인다.
이번 방한에서 황 CEO의 동선이 이를 보여준다. 황 CEO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물론 SK텔레콤, 네이버, 현대차그룹, LG그룹, 두산 등 한국의 제조·통신·플랫폼·로봇 기업을 두루 만났다.
엔비디아의 다음 성장판이 데이터센터 안에만 머물지 않고 자동차, 공장, 로봇, 온디바이스 AI로 확장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 기업들은 그 확장판에서 단순 고객이 아니라 공급자이자 공동 개발자, 실증 파트너 역할을 동시에 맡게 됐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8일 현대차그룹 양재사옥에서 비공개 회의를 마친 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데일리안 편은지 기자
실제 이번 방한 기간 동안 총수들과의 회동을 통해 엔비디아와 국내 기업의 협력방안은 상당히 구체화됐다. 우선 현대차그룹과는 피지컬 AI를 기반으로 자동차, 로봇, 스마트 팩토리 등 다양한 협력 방안을 강구하기로 했다.
현대차그룹은 완성차 제조 역량과 보스턴다이내믹스의 로봇 기술, 새만금 AI 기술센터 구상까지 갖고 있다. 엔비디아 입장에서는 자사의 AI 칩과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실제 산업 현장에 적용해볼 수 있는 거대한 테스트베드인 셈이다.
삼성전자와의 접점도 넓어졌다. 그동안 엔비디아와 삼성의 관계는 HBM 공급 여부에 관심이 집중됐지만, 이번에는 차세대 파운드리와 AI 반도체 협력 가능성까지 거론됐다.
엔비디아가 AI 칩 설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면, 이를 실제 제품으로 만들고 공급망을 안정화하는 데는 메모리와 파운드리 역량이 필수다. 삼성 입장에서도 엔비디아와의 협력은 HBM 추격전뿐 아니라 파운드리 재도약의 상징적 카드가 될 수 있다.
SK그룹과의 관계는 한층 더 직접적이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 AI 가속기에 들어가는 HBM 핵심 공급망으로 자리 잡았고, SK텔레콤은 AI 클라우드와 AI 팩토리 구축을 통해 엔비디아 플랫폼을 서비스 인프라로 확장하는 역할을 맡는다. 단순히 칩을 팔고 사는 관계를 넘어, 엔비디아의 AI 인프라 사업과 SK의 통신·데이터센터 사업이 맞물리는 구조다.
네이버와 LG, 두산의 역할도 작지 않다. 네이버는 자체 클라우드와 초거대 AI, 검색·커머스·콘텐츠 생태계를 가진 국내 대표 플랫폼 기업이다. LG는 전자·배터리·전장·로봇·데이터센터 수요를 모두 갖춘 그룹이고, 두산은 산업용 로봇과 제조 현장에 강점이 있다.
업계에서는 이번 방한을 통해 AI 산업의 무게중심이 반도체 설계와 데이터센터를 넘어 제조, 로봇, 모빌리티, 통신 인프라로 이동하면서 한국 기업들의 전략적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다만, 엔비디아와의 협력이 글로벌 AI 생태계의 핵심 축에 올라탈 수 있는 통로이면서, 동시에 엔비디아 의존도가 더 커질 수 있다는 점에서 국내 기업들에게는 부담이 더욱 커질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10월의 깐부 회동이 한국 기업들이 엔비디아와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느냐를 보여준 장면이었다면, 이번 관전 포인트는 엔비디아가 한국 기업들을 얼마나 필요로 하느냐다”라며 “더 많은 HBM, 더 촘촘한 AI 클라우드, 더 빠른 로봇 상용화, 더 강한 제조 AI 파트너가 필요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