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반도체, ‘K푸드·K뷰티’에 답있다 [임유정의 혜안]
입력 2026.06.09 07:00
수정 2026.06.09 08:04
박스피 오명 벗고 코스피 8000 시대
수출 견인한 반도체, 커진 의존 리스크
K푸드·K뷰티, 새로운 성장축 부상
초격차보다 중요한 산업 포트폴리오
인천 연수구 인천신항 컨테이너 터미널에 컨테이너가 쌓여 있다.ⓒ뉴시스
한국 경제가 이룬 성과는 경탄할 만하다. 1960년대 한국은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로 분류됐지만, 반세기 만에 반도체·자동차·조선·배터리 등 첨단 산업을 이끄는 경제 강국으로 올라섰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낸 세계적으로 드문 사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자본시장의 평가는 인색했다. 오랫 동안 한국 증시는 ‘박스피’라는 조롱을 받았다. 한국 경제가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하는 동안에도 증시는 저평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정학적 불안과 지배구조 논란 등은 ‘코리아 디스카운트’로 이어지며 기업 가치를 제약했다.
그러나 최근 글로벌 시장이 한국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 배경의 최전선에는 반도체 산업의 압도적인 경쟁력이 있다. 코스피지수가 지난 5월 15일 장중 사상 처음으로 8000선을 돌파한 배경에도 반도체 호황이 자리한다. 1년 전만 해도 감히 쳐다볼 수 없었던 봉우리다.
자본시장의 재평가는 실물경제 성과와도 맞닿아 있다. 산업통상부에 따르면 5월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53.2% 증가한 877.5억(약 133조 원) 를 넘어 월간 기준 역대 최대 기록을 다시 썼다. 그 중에서도 반도체 수출 증가율은 169%로, 반도체 외 품목(16%)의 10배를 웃돌았다.
이는 중동전쟁 등 대외 불확실성 속에서 거둔 값진 성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을 객관화해 보면 겸손해진다. 화려한 성적표 이면에는 ‘반도체 쏠림’이라는 구조적 한계가 뚜렷하다. 나라의 주력 산업에 균열이 생기면 국가 전체의 경제·안보 전략이 흔들릴 수 밖에 없다.
이제는 국가 경제도 포트폴리오가 중요하다. 기업이 특정 사업에만 의존할수록 위험이 커지듯 국가 역시 특정 산업 하나에 성장 동력을 의존할수록 외부 충격에 취약해진다. 반도체 업황이 좋을 때는 문제가 드러나지 않지만 사이클이 꺾이는 순간 경제 전반이 흔들릴 수 있다.
한국 경제는 이미 여러 차례 이를 경험했다. 반도체 가격 하락이 시작될 때마다 수출 증가율은 급격히 둔화했고 성장률 전망도 함께 낮아졌다. 반도체는 한국 경제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지만 동시에 가장 큰 ‘집중 위험’(concentration risk)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K-푸드와 K-뷰티의 성장은 단순한 소비 트렌드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특정 기업의 수출 성과를 넘어 생산·유통·물류·콘텐츠 산업 전반에 온기를 확산시키는 새로운 성장축이자 한국 경제의 산업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K-뷰티 산업은 아모레퍼시픽이나 LG생활건강 같은 대기업 중심 구조를 넘어 중소 인디 브랜드와 ODM(제조업자개발생산)기업, 유통 플랫폼이 함께 성장하는 생태계를 구축했다. 제품 기획과 생산, 판매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수출 저변도 한층 넓어졌다.
K-푸드 역시 제조사와 유통사, 콘텐츠 산업이 하나로 연결되며 새로운 수출 모델을 만들어내고 있다. 1억6000만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미국 래퍼 카디비가 자신의 SNS에 동원참치 먹방 영상을 공개해 화제를 모은 사례는 K-콘텐츠가 수출 확대로 연결되는 선순환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K-푸드의 경쟁력은 더 이상 화제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삼양식품의 ‘불닭 시리즈’는 지난 5월 말 기준 출시 14년 만에 누적 판매량 100억 개, 누적 매출 7조 원을 돌파했다. 불닭볶음면 같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품목을 키워내는 일에도 소홀해선 안 되는 이유다.
물론 K-푸드와 K-뷰티가 반도체를 대체할 수는 없다. 수출 규모도, 생산성도,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비교하기 어렵다. 다만 K-팝과 K-드라마를 통해 형성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실제 소비로 이어지며 식품과 화장품 수출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특정 기업에 국한되지 않고 중소기업과 농가, 제조업체, 유통업체까지 수혜가 확산될 수 있다는 점에서 K-푸드와 K-뷰티는 한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축으로 키워볼 만한 충분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중소기업, 농가, 협력업체, 유통망까지 성장의 과실을 나눌 수 있는 산업이다.
지금 한국 경제에 필요한 것은 특정 산업의 초격차가 아니라 성장 동력의 다변화다. 반도체가 벌어들이는 외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수출 산업을 육성해야 하는 이유다. 경제의 지속 가능성은 가장 강한 산업 하나가 아닌 여러 산업이 함께 성장하는 구조에서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