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없는 거래소'는 혁신을 낳을 수 없다 [기자수첩-ICT]
입력 2026.02.05 07:00
수정 2026.02.05 07:00
금융위, 가상자산 거래소 대주주 지분 15~20% 제한
미국은 '크립토 허브' 뛰는데 한국은 '지분 쪼개기' 족쇄
ⓒ데일리안 AI 삽화 이미지
가상자산 시장을 바라보는 금융당국의 시계가 유독 거꾸로 흐르고 있다. 최근 금융위원회가 가상자산 거래소의 대주주 지분율을 15~20% 수준으로 제한하는 방안 검토에 나서며 시장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거래소가 지닌 공공 인프라 성격을 고려해 특정인이나 법인의 독점을 막겠다는 취지다.
이런 발상은 가상자산 거래소를 전통 자본시장과 같은 잣대로 놓고 보는 시각에서 기인한 듯하다. 그게 맞다면 가상자산 플랫폼의 본질적 특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가상자산 거래소는 증권사와 시장 운영 주체가 분리된 전통 자본시장과는 구조적으로 다르다. 소매 기반의 B2C 플랫폼이자, 365일 24시간 전 세계와 실시간으로 경쟁하는 글로벌 테크 기업의 성격이 짙기 때문이다.
바이낸스나 코인베이스 같은 글로벌 공룡들이 빠르게 몸집을 불려 가는 원동력은 대주주의 강력한 리더십이다. 시장 변화에 즉각 대응하고, 나아가 시장 변화를 리드하는 과감한 판단은 지분을 나눠 든 여러 주주들의 합의를 통해 도출되는 게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거래소에만 '지분 분산'을 강요하는 게 정부의 가상자산 대주주 지분율 제한이다. 의사결정 구조의 유연성을 제거해 언제까지고 글로벌 공룡의 뒤만 밟도록 족쇄를 채워 놓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여진다.
더 큰 문제는 이 규제가 '소급 적용'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업비트(송치형 의장 25.52%), 빗썸(빗썸홀딩스 73.56%), 코인원(차명훈 대표 등 53.44%) 등 국내 주요 거래소들은 모두 금융위가 제시한 기준을 훌쩍 넘긴다.
만약 법안이 그대로 시행된다면, 이들은 수년간 피땀 흘려 키워온 회사의 경영권을 강제로 시장에 내놓아야 한다. 사유재산권 침해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인위적인 지분 분산이 가져올 경영권 흔들림과 자본 유출의 책임을 당국이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동안 당국이 보여준 행보를 복기해보면 이번 지배구조 규제는 더욱 앞뒤가 맞지 않는다.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승인은 여전히 '검토 중'이라는 말 뒤에 숨어 있고, 법인 투자 허용 로드맵은 해가 바뀌어도 깜깜무소식이다. 시장이 간절히 원하는 성장의 통로는 꽉 막아둔 채 느닷없이 지배구조라는 족쇄부터 채우려는 행보는 규제를 위한 규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가상자산 시장은 민간이 쌓아올린 성과 위에서 성장해왔다. 정부가 거래소 폐쇄를 논의하고 "내재적 가치가 없다"고 폄하하던 시절에도, 시장은 스스로 진화하며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해왔다. 이제 와서 제도권 편입을 명분으로 획일적 잣대를 들이대는 건 시장 성장을 가로막는 일이다.
진정 거래소의 공공성을 강화하고 싶다면 지분율이라는 숫자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강화하고 내부통제 시스템을 촘촘히 하는 '행위 규제'에 집중해야 한다. 투명한 감시 체계를 만드는 것과 '주인'을 없애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미 정치권에서도 이 규제가 'K-가상자산'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독자적인 규제가 될 것을 우려해 단일안에서 제외하려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가상자산 정책 구체화에 속도를 내고 있고, 주요국들은 국익을 최우선으로 제도를 정비 중이다. 한국만 '공공성'이라는 추상적 명분 뒤에 숨어 관치 금융의 유혹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다. 규제는 시장을 죽이는 칼이 아니라 성장을 돕는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 당국은 지금이라도 시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억지 지분 분산이 아닌 글로벌 기준에 맞는 합리적 규율 체계를 고민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