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이름으로 [D:쇼트 시네마(124)]
입력 2025.06.19 08:46
수정 2025.06.19 08:46
김수진 감독 연출
OTT를 통해 상업영화 뿐 아니라 독립, 단편작들을 과거보다 수월하게 만날 수 있는 무대가 생겼습니다. 그중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부터 사회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메시지까지 짧고 굵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50분 이하의 영화들을 찾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윤진(이명하 분)은 아파트 현관 앞 복도 계단에 앉아 있는 지훈(최규영 분)을 보게 된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 경비실에서 택배를 받아온 윤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지훈에게 자신의 집에서 부모님을 기다리라고 권유한다.
지훈을 집에 들인 윤진은 물을 건네고, 노트북을 할 수 있도록 선의를 베푼다. 깜빡 잠에 든 윤진이 깨어나자 화장실에서 드라이기 소리가 들린다. 지훈이 실수로 노트북에 물을 쏟은 것. 윤진은 지훈의 엄마의 번호로 전화를 걸지만 없는 번호라는 음성 메시지가 들려온다.
지훈이 설명하는 자초지종은 이렇다. 부모님이 크게 싸웠고 아빠가 엄마를 죽일 뻔해 엄마는 오늘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다. 그리고 지훈은 하루만 이 집에 숨겨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윤진은 자신의 영역을 조금씩 침범하는 지훈의 행동이 불안하다. 속옷 서랍을 뒤진듯한 흔적, 꺼진 화면에 비친 자신을 훔쳐보는 듯한 지훈의 깜빡이는 눈, 흐트러진 빨래 바구니가 지훈을 의심하게 만든다.
결국 지훈이 잠든 사이 가방을 뒤지고, 윤진은 그 안에 들어있던 식칼에 손가락을 베이고 만다. 놀란 윤진에게 지훈은 아빠가 같이 죽자고 위협해 무서워서 가지고 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그날 밤 지훈의 아빠가 돌아왔고, 지훈은 불안해 하는 눈빛을 한 채 집으로 돌아간다.
지쳐 잠이 든 윤진은 물에 흠뻑 젖은 채 지훈이 누르는 초인종 소리에 깬다. 그러나 윤진은 지훈의 초인종 소리를 외면하고 만다. 그 순간 잠에서 깨고, 윤진은 지훈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를지 말지 망설인다.
'선'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공간, 아파트라는 익숙한 배경 속에서 시작된다. 누구나 한번쯤 맞닥뜨릴 법한 상황이다. 현관 앞에 쪼그려 앉은 아이, 선의를 베풀며 문을 열어주는 어른은 선의로 시작된 평범한 일상이지만, 긴장과 의심, 윤리적 딜레마로 균열이 나타난다.
김수진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베푸는 것이 온전한 선의인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거절하는 것은 잘못인지라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 속 윤진은 이 질문들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한다.
인상적인 지점은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이 영화는 공포영화나 범죄극처럼 큰 사건이나 자극적인 장면 없이도 불편함을 만들어낸다. 지훈의 눈빛, 살짝 열려 있는 서랍, 젖은 손으로 울리는 초인종 같은 디테일이 긴장감을 자아낸다.
지훈의 초인종 소리를 외면한 후 윤진이 그의 집 앞에서 망설이는 장면은, 선의로 시작된 작은 호의가 감당하고 싶지 않은 상황으로 번져 남은 죄의식을 보여준다. 러닝타임 26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