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명대사①] 티파니에서 아침을 “그게 유일한 행복의 기회니까”
입력 2021.01.27 00:00
수정 2021.01.26 20:16
영화 ‘타파니에서 아침을’(감독 블레이크 에드워즈)은 1961년 작품이다. 요즘엔 ‘진지충’이라는 말로 매사 진지한 것이 비난이나 조롱거리가 되기 쉽지만, 과거엔 멜로 영화에도 메시지가 선명한 경우가 많았다. 단순히 선악 구도 아래 착하게 살자는 교훈을 주는 게 아니었다. [홍종선의 올드무비] 코너를 통해 소개한 바도 있는 프랑스영화 ‘미치광이 피에로’(1965), 오늘 소개하는 ‘티파니에서 아침을’ 같은 로맨틱 영화와 같이 삶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대사들을 어렵지 않게 만났다.
물론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불세출의 배우 오드리 헵번, 다시는 살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영원히 스크린 속에 존재하는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매우 매우 행복한 영화다. 삶의 고난을 그 나라의 50대 부호를 통해 헤쳐나가려 하든, 비뚤어진 방법으로 돈을 벌든, 순진과 요염을 오가든 그 어떤 캐릭터라 해도 헵번이 연기한 이상 ‘홀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할 리가 창가에 앉아 기타를 치며 부르는 노래 ‘문 리버’를 듣는 것만으로도 영화를 다시 보는 기쁨이 있는 영화기도 하다. 헵번을 홀리로 만드는 데 일조한 지방시의 이브닝드레스를 비롯해 멋진 의상들, 헵번의 이목구비를 화면 가득 살리는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더욱 빛나게 하는 대사들이 영화 내내 촘촘히 박혀 있다.
작품 속 명대사를 살펴보는 코너를 시작하면서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고른 이유가 있다. 개인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유의미하다고 믿는 ‘사랑’에 대해 통렬한 깨달음을 주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해 사랑으로 얘기하는 것도 좋지만, 먼 길을 돌아 사랑에 도착할 때의 감동은 너무나 크다.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SF블록버스터 ‘인터스텔라’, 우주를 돌고 돌아 블랙홀과 6차원의 신비를 통과해 결국은 사랑이라는 범 우주적 진리에 도달했을 때. 사랑 따윈 믿지 않고 타고난 미모와 ‘가짜는 가짠데 진짜 같은 이상한’ 오묘한 분위기를 통해 부호를 꼬셔 처한 현실에서 벗어나려 하는 홀리가 떨치려 떨치려 했지만 결국 가난한 작가에게로, 진정한 사랑을 선택했을 때. 그런 순간들을 좋아한다.
홀리: 슬플 때면 그냥 택시를 타고 티파니에 가요.
그럼 금방 기분이 좋아져요,
그 조용함과 고고함이 있죠,
거기선 나쁜 일은 생기지 않아요.
티파니 같은 느낌을 주는 진짜 집을 구할 수 있으면
그땐 가구도 사고 고양이 이름도 지어주겠어요.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 택시가 멈추면, 아침 댓바람부터 등이 훤한 블랙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보석을 목에 걸고 목덜미가 드러나게 머리를 한껏 올린 여인이 내린다. 레드카펫을 방금 지나온 배우 같기도 하고, 왕의 즉위식에 참석한 공주 같기도 한 모습. 팔꿈치를 넘는 긴 길기의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흰 봉투에서 크로와상을 꺼내 들고, 다른 손에는 빵 봉지와 커피를 들고 그는 아직 열리지 않은 티파니 매장의 쇼윈도를 구경한다. 첫 장면만 봐도 벌써 심장이 뛴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영화의 타이틀 그대로의 장면이 눈 앞에 펼쳐진다.
홀리의 집은 이제 막 이사 온 것처럼 별다른 가구도 없고 정리도 돼 있지 않다. 내 진짜 집은 여기가 아니고, 내가 정착할 곳은 여기가 아니기에 임시로 머문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홀리가 원하는 집은 티파니 매장 같은 곳이다. 그렇다고 비싼 다이아몬드가 가득한 집을 말하는 건 아니다. 모두가 일상을 잠시 잊고 고가의 액세서리를 구매하며 기쁨을 누리고 성공을 확인하는 장소. 설사 10달러 이하의 물건을 원한다고 말해도 면박을 주는 대신 이름을 새길 수 있다고 답해 주는 매너가 있는 곳. 어렸을 때부터, 어린 동생과 굶지 않고 잠들 수 있는 곳을 얻기 위해 열다섯의 나이에 아저씨와 결혼해야 했던 때는 더욱, 세상은 자신에게 불친절하다고 느꼈을 홀리가 원하는 풍경이다. 그렇게 나를 위한 진짜 집이 생기면 그때는 가구도 사고 안쓰러워 집에 들인 길고양이에게도 이름을 붙이고, 가구도 고양이도 ‘내 것’으로 ‘내게 속하는 나의 소중한 무엇’으로 삼을 생각인 것이다.
홀리: 하나는 분명해요, 프레드. 돈만 있다면 당장 자기와 결혼하겠어요.
돈이 있다면 당장 나와 결혼하겠어요?
폴: 당장 하죠.
홀리: 그러니 우린, 둘 다 부자 아닌 게 다행이네요.
흔들린 적 없는 홀리의 인생 업그레이드 계획에 흔들림이 생긴다. 윗집으로 이사 온 작가 폴 바잭.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고 얘기도 잘 통하고 신사적이다. 하지만 폴 역시 가난하다. 홀리가 재산 규모에 따라 ‘쥐’ ‘슈퍼쥐’라고 부르는 남자들의 자신을 향한 흠모에 기생하듯 폴 역시 부유한 유부녀 ‘2-E’에게 재정적 지원을 받으며 생계를 해결한다. 홀리의 계획에 가난한 남자는 없다. 하지만 어쩐지 자꾸만 마음이 간다. 두 사람은 겉으론 아니라면서 각자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것을 하자며 도서관에 가서 폴의 책도 빌려서 보고, 잡화점에 가서 가면도 하나씩 훔쳐 쓰고 나온다. 데이트가 아니라지만 데이트다.
폴: (홀리는) 누굴 돌볼 만한 사람이 못 돼요. 자기 자신도 돌볼 줄 모르는데요.
내가 도와야 해요.
내가 그런 입장이 되니까 좋은 거예요.
자신의 마음을 먼저, 명확히 깨달을 건 폴이다. 2-E에게 작별을 고한다. 2-E는 홀리와 여행을 다녀오라며, 그러면 될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하지만. 폴은 단호하다. 2-E가 구해진 집도, 그가 사준 옷들도 모두 놓고 떠난다. 새 애인을 구하면 팔이 긴 남자를 구하라고, 그러면 숱한 수트의 팔길이를 줄일 필요가 없을 거라고 말하며. 그렇게 홀리의 윗집을 떠나는 폴. 늘 2-E 또는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다가 이제는 자신이 홀리를 도와야 하는 상황이 된 것에 기뻐한다, 사랑이다.
그 사이, 홀리는 미국의 부자 순위 50위 안에 드는 남자와의 결혼도 노려 보고, 브라질의 미래 대통령이 될 남자와는 결혼 문턱까지 가기도 했지만, 불발이다. 미국 부자는 알고 보니 빈털터리라 돈 많은 여자와 결혼을 발표하고, 마약범 토마토를 주 1회 면회하는 대가로 100달러를 받았던 홀리의 고액 아르바이트가 ‘날씨 예보를 통한 암호 전달’이었음이 드러나면서 브라질 부자는 결별을 고한다.
때도 참 얄궂어서, 홀리가 간만에 폴에게 연락해 브라질 부호 호세와의 결혼 사실을 알리고, 이제 내일이면 브라질로 떠난다고 말한 상황. 호세에 대한 인상은 폴도 좋았기에 축하를 전하고 헤어졌는데. 홀리는 경찰에 체포되고, 폴은 할리우드의 버먼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버먼은 이미 자신의 뉴욕 변호사를 통해 보석금 만 달러를 내고 홀리의 가석방 조치를 해 놓았다고 말한다. 다음 날 아침 경찰서 앞에 홀리를 배웅 나온 폴, 언론의 추적을 피해 택시로 미리 잡아둔 호텔로 가려 하는데 호세의 결단을 모르는 홀리는 공항으로 가겠다고 우긴다. 결국, 폴이 호세의 이별 통보 편지를 읽어 주고, 홀리는 그런 편지는 립스틱 없이 들을 수 없다며 입술화장을 하며 ‘신데렐라의 꿈’이 깨지는 소리를 듣는다. 그때 폴이 용기를 낸다.
폴: 홀리, 가도록 허락하지 않겠어요.
홀리: 허락을 안 해요?
폴: 홀리, 당신을 사랑해요.
홀리: 그래서요?
폴: 그래서라니? 그건 엄청난 거예요. 사랑해, 당신은 내 사람이야.
홀리: 아니, 사람은 소유할 수 없어요
폴: 할 수 있어요.
홀리: 아무도 날 우리에 가두지 못해요.
폴: 우리에 가두자는 게 아니야.
당신을 사랑하고 싶어요.
홀리: 같은 거예요.
폴: 그렇지 않아, 홀리
홀리: 난 홀리도 룰라메이(늙은 아저씨의 부인이 되어 살 때의 본명)도 아니에요.
난 내가 누군지 몰라요.
난 이 고양이처럼 이름도 없고 누구의 소유도 아니에요.
우린 서로 소유하지 않아요.
두 사람은 ‘belong’(~소유이다, ~에 속하다)이라는 단어를 주고받으며 싸운다. 홀리가 이제 화려하지만 ‘가짜’의 삶을 내려놓고 소박하지만 ‘진짜’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폴. 자신에게 속해, 폴의 사람으로,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하지만. 홀리는 그것을 독점, 소유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우리에 가두려고 한다고 여긴다. 룰라메이가 아저씨의 소유가 아니었듯이 홀리도 누군가의 소유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척박한 세상 속에서 자신을 지켜온 나름의 방법이다. 난 내가 누군지 모른다, 이름이 없다는 말. 김춘수의 시 ‘꽃’이 생각 나는 대목이다. 네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나는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되었다. 본능적 끌림에 홀리는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동생의 이름, 프레드를 폴에게 붙였으면서 그렇게 불렀으면서 자신에게는 이름이 없다고 한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 가짜인 자신을 진짜로 만들어 줄 누군가에게는 홀리가 소속을 허락할 수 있을까.
폴: 뭐가 잘못된 줄 알아? 이름 없는 아가씨.
당신은 비겁해, 용기가 없어.
당당히 고개를 들고 ‘인생은 사실이다’ 하기 무서운 거야.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속하는 거야. 그게 유일한 행복의 기회니까.
당신은 자칭 자유분방하고 와일드 하다고 하면서
누군가가 우리에 가둘 것을 두려워하고 있어.
그러면서 이미 스스로 지은 우리에 갇힌 거야.
텍사스 튤립도, 소말릴란드도 아냐. 당신이 가는 모든 곳이지.
어디로 도망쳐도 자신에게 되돌아올 뿐이야.
사랑 고백을 보기 좋게 거절당한 폴은 택시비를 내고 차를 멈춘다. 차 문을 열고 내린 폴은 차안의 홀리를 향해 진실한 충고, 너무 솔직해서 아픈 직구를 던진다. 비겁하고 용기가 없어서 사실의 인생을 살지 못하고 가짜 인생을 살고 있다. 누군가가 자신을 우리에 가둘까봐 두려워하지만, 실은 스스로 지은 우리에 갇혔다. 늙은 홀아비와 살았던 곳, 동생 프레드와 함께 도망쳐 나온 곳 텍사스주 튤립에 갇혀 있던 게 아니다. 멀리 아프리카의 소말릴란드로 도망간다고 벗어난 게 아니다. 당신이 가는 모든 곳에 스스로 지은 우리가 있다. 폴이 홀리에게 하는 말이지만, 가슴이 콕콕 아프다. 나는 아니라고, 나를 가둔 우리가 실은 내가 지은 우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래도 가장 멋진 대사는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속하는 거야. 그게 유일한 행복의 기회니까”이다. 이 대사 하나를 향해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달려왔고, 배우 조지 페파드는 폴을 연기했다. 영화는 말한다.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소속감을 느끼는 데 있다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 역시 사랑이다.
폴은 마지막으로 수개월 품에 품고 다녔던 작은 상자 하나를 홀리에게 던지고 떠난다. 홀 리가 차 밖으로 내쫓은 길고양이를 찾아. 반지를 낄까 말까, 낄까 말까 망설이다가 폴이 간 쪽을 뒤돌아보는 홀리. 깔까 말까, 드디어 반지를 왼손 약지에 낀다! 택시에서 내려, 피우던 담배도 던지고 달린다, 폴에게로. 이제 대사는 필요 없다, 사랑의 키스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