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상남자 정의선 "잘못했으면 책임지고 당당하게 일하라"
입력 2020.03.11 11:09
수정 2020.03.12 03:43
쏘렌토 하이브리드 사태 '고객 우선' 방침으로 '정공법' 선택
위기 돌파하는 강한 결단력 입증…임직원 사기저하도 막아
지난달 21일 기아자동차에 비상이 걸렸다. 중형 SUV 시장에서 친환경차 돌풍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신형 쏘렌토 하이브리드의 연비가 친환경차 세제혜택 기준에 미달된다는 것을 뒤늦게 확인한 것이다.
이미 사전계약 개시 전날인 지난달 19일부터 친환경차 인증을 받는다는 전제 하에 친환경차 세제(개별소비세, 교육세, 취득세 감면) 기준으로 자동차 가격을 고지한 상태라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세제혜택 기준 가격으로 사전계약한 고객들에게 그보다 더 오른 비용을 지불하라고 하면 거센 반발에 직면할 것은 뻔한 상황이었다.
일단 이날 오후 4시부터 쏘렌토 하이브리드의 사전계약 접수를 중단했다. 이 시점까지 신형 쏘렌토 사전계약 대수는 2만1884대였고, 그 중 하이브리드는 1만3850대에 달했다.
하이브리드 모델이 전통적으로 SUV에서 많이 선호 받는 디젤 모델을 넘어 63% 이상을 점유한 것이다. 쏘렌토 하이브리드에 대한 기대 이상의 인기가 기아차에게는 오히려 독(毒)으로 작용할 소지가 컸다.
긴급 회의가 열렸다. 고지 가격대로 판매할 경우 기아차가 막대한 부담을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쏘렌토 하이브리드가 친환경차로 인증 받았을 경우의 세제혜택은 230여만원으로, 이를 계약 대수만큼 부담할 경우 필요한 비용은 300억원에 달했다. 개소세 인하로 소요 비용이 일부 줄어들겠지만 회사에는 큰 타격이다. 특히 실적 악화는 물론 주가에까지 영향을 미칠 사안이었다.
주요 경영진과 실무진들은 머리를 맞댄 끝에 몇 가지 방안을 마련해 그룹 최고위층에 전달했다. 그 중에는 사전계약 고객들에게 사과하고 계약 취소를 하는 방식, 세제 혜택에 해당하는 금액을 전액 보장하는 방식, 해당 금액을 절반만 보장하는 방식 등이 포함됐다.
이들 방안을 전달받은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의 선택은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그룹 관계자에 따르면 정 수석부회장은 “잘못을 했으면 회사가 그에 대한 책임을 지면 된다. 손실이 두려워 전전긍긍하지 말고 당당하게 일하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평소 ‘고객가치 최우선’ 경영 방침을 강조해 온 정 수석부회장다운 선택이었다. 아울러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실수를 저질러 의기소침해 있을 기아차 임직원들도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따라 기아차는 지난 6일 쏘렌토 하이브리드 사전계약자 전원에게 친환경차 세제혜택에 해당하는 비용 전액을 대신 부담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번 사태로 피해를 입을 것으로 우려됐던 사전계약자들은 오히려 수혜를 입게 됐다.
이같은 결단으로 기아차는 상당한 비용 부담을 안게 됐지만 대신 장기적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만일 정 수석부회장이 다른 결론을 내렸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 사전계약을 취소했다면 아무리 석고대죄를 한들 소비자들과의 약속을 저버렸다는 비난에 직면했을 테고, 신뢰도 잃었을 것이다. 비용을 일부만 부담한다고 해도 고객들의 불만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기아차 임직원들의 사기도 땅에 떨어졌을 것이다. 사기가 꺾이고 실수에 대한 압박이 커지면 업무에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다. 회사로서는 단기적인 비용 부담보다 더 큰 손실이 될 수 있다.
결국 쏘렌토 하이브리드 사태에서 정 수석부회장은 ‘정공법’을 택했고, 이를 통해 현대차그룹은 ‘소비자와의 약속은 설령 실수에서 비롯된 것이더라도 반드시 지킨다’는 신뢰를 얻게 됐다. 정직과 신뢰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기업의 경쟁력이다.
기아차 임직원들도 당당하게 업무에 임할 수 있게 됐다. 나아가 앞으로 현대차그룹을 이끌게 될 젊은 총수가 위기를 헤쳐 나갈 강력한 결단력을 갖췄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수백억원의 비용이 결코 아깝지 않은 성과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