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해전´ 당시 사령관 "총 맞을 시간 기다렸다"

윤경원 기자
입력 2006.06.19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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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성 해군 제독 인터뷰…"선제 공격 금지는 군인 손발 묶어놓는 것"

"북한의 어떠한 시도와 도발에도 NLL은 고수해야"


“‘선제공격 금지’라는 상부지시는 아군은 손발을 묶어 놓고 싸우라는 것이었다.”

1999년 6월의 연평해전을 기억하는가. 혹자는 2002년의 서해교전과 헷갈리는 실수를 범하기도 하지만 이는 엄연히 북한에서 사전 계획된 도발로 시작된 한국 전쟁 이후 남북한 간의 가장 큰 규모의 해상 전쟁이었다.

지난 15일이 바로 연평해전 7주년이 되는 날로 평택 해군 2함대에서는 연평해전 이후 처음으로 이미 예비역이 된 당시 지휘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기념식이 있었다.

“두두두…파파팍” 1999년 6월 15일 오전 9시 28분, 서해상 서측 북방한계선(NLL:North Limit Line)을 침범한 북한 함정에서 우리 고속정을 향해 선제사격이 시작됐다.

‘절대 먼저 사격 하지 말라’는 상부의 지침으로 포위기동과 함미충돌 전술만 써왔던 우리 해군은 곧바로 자위권 차원의 반격을 시작했다.

포탄이 터지고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는 아비규환의 14분. 결과는 우리 해군 측의 일방적인 대승이었다. 북한 측은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4~5척의 함정이 격침·대파됐고 5~6척의 함정은 큰 파손을 입고 퇴각했다.

반면 우리 해군은 초계함과 고속정 1척이 경미한 손상을 입고 11명의 고속정 장병들이 부상당하는데 그쳐 우리 해군의 압도적이고 일방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과거 대한민국의 안보 위기는 대부분 북한 도발로 시작됐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1.21 청와대 습격사건(1968년), 프에블로(Pueblo)호 납치사건(1968년),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1968년), 8.18판문점 도끼만행사건(1976년), 버마 아웅산 폭파사건(1983년), KAL기 폭파사건(1987년), 북한 잠수함침투사건(1996년, 1998년) 등이다.

이같은 위기를 겪으면서 한국은 주권 국가 수준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피동적으로 수습해왔지만 연평해전은 국가적 위기 상황을 정면 돌파함으로서 국가로서의 자존심을 지킨 ‘위기 관리 사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당시 해군 2함대 사령관으로서 ‘연평해전’을 진두지휘하며 승리로 이끌었던 박정성(57) 제독은 그해 11월 돌연 해군본부로 대기 인사발령을 받았다. 통상 1년에서 1년 반 정도인 함대 사령관 임기를 채우지도 못한 채 할일 없이 해군본부에서 대기하는 보직으로 이동된 것은 사실상 좌천이었다.

“연평해전 이후 남북 차관급 회담에서 북한 측이 이 전투의 남조선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하더군요.”

16일 여의도의 한 커피숍에서 데일리안과 만난 박 제독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인사권자의 고유 권한으로 지시하는 것을 갖고 가타부타 말할 것이 못 된다”면서도 북한 지도부의 한마디에 전쟁에서 승리한 지휘관을 오히려 좌천시키는 당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못내 안타깝다는 눈치다.

“6개월 동안 하는 일도 없이 가만히 앉아만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야권에서 문제제기를 하더군요. 어떻게 소식을 알았는지 박세환 전 의원이 국회에서 이 문제를 갖고 따졌고 그래서인지 해군본부 군수참모부장으로 보직 발령을 받았고 이후 정보작전 참모부장을 거쳐 해군 군수사령관을 끝으로 2004년 4월에 전역했습니다.”

당시 박 제독의 제대를 두고 민병돈 전 육군사관학교 교장은 한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박정성 해군 소장이 끝내 중장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제대해야만 했던 사정을 짐작할 만하다”면서 “북한 함정들의 NLL 침범으로 발생한 ‘연평해전’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둔 서해함대 사령관에 대한 보답이 겨우 ‘조용한 제대’”라며 노무현 정권의 군 관리에 대한 처사를 비판했다.

이날 박 제독은 현 시국에 대해 “현재 우리 사회의 갈등과 혼란으로 생기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특히 그중에서 먹고 살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경제 문제와 더불어 안보가 크게 불안하다는 것”이라며 “국민들이 북한에 대해 너무 감성적으로 생각하고 북한 정권의 실체를 너무 모르고 안보를 식상하게만 생각하는 것이 큰 걱정”이라고 말했다.

박 제독은 동·서·남해에서 북한 잠수함, 반잠수 공작선, 간첩선 등이 출몰하던 무렵인 1998년 11월에 해군 2함대 사령관으로 발령받았다고 한다. 그는 그간 군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5~6월경 북한이 반드시 도발할 것을 예상하고 예의 주시하면서 서해에서 그들이 도발할 수 있는 상황을 고려해 대비 계획을 마련하고 매일 주․야로 강한 훈련에 돌입했다.

예상대로 2함대의 대비계획에 따른 교육훈련이 거의 끝난 무렵인 이듬해 6월 6일 적의 평상시와 다른 행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6월 6일 현충일 아침이었습니다. 일찍 일어나 정복을 차려입고 현충탑 참배를 위해 출발하려는데 북한 어선 20여척과 경비정 3척이 NLL을 월선해 남하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곧바로 사령부 지휘통제실에 가서 보니 북한 함정의 행동이 평상시와 달랐습니다. 북한 함정 3척은 NLL을 넘어 오더니 이를 막는 우리 함정을 들이 받으려 하더군요. 북한의 계획적인 도발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 함대를 비상소집하고 즉각 경계태세에 들어갔죠. 북한 함정은 밤이 되면 철수하였다가 해가 뜨면 NLL을 넘어 들어왔는데 날이 갈수록 북한 함정의 척수가 불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 해군은 교전규칙과 작전절차가 규정화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제 공격은 할 수 없었다. 당시 정부는 ▲선제사격 절대금지 ▲확전금지 ▲NLL 고수라는 지침을 철저히 지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햇볕정책을 추진하던 김대중 정부의 북한을 다분히 의식한 조치로 보였다.

박 제독은 “자위권을 위해 먼저 발포하지 말라는 것은 아군의 손발을 묶어놓고 싸우라는 것과 같다”며 “상부지시로 북한함정에 대응하는데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작전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소회했다.

이에 대한 고육지책으로 박 제독은 북한 함정의 정면충돌 공격에 대응해 배의 선체 중 구조적으로 가장 취약한 선미 충돌 공격으로 맞섰다. “우리 함정이 북한 함정보다 크기는 작지만 적함의 꽁무니를 공격하면 우리 고속정은 거의 손상이 없는 반면 받히는 적함은 기동이 곤란할 정도의 치명상을 입는다”는 것이 박 제독의 설명이다.

“북한 함정의 척수가 점점 늘어남에 따라 아측 함정도 증강 배치해 지루하고도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됐습니다. 그러다 6월 9일, 공방전을 벌이던 우리 고속정 1척이 옆구리를 들이 받히는 손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그는 북한 함정과의 첫 충돌 상황을 설명했다.

연평도 서측 NLL 근해 좁은 해역에 북한 함정 10여척, 북한 어선 20여척, 아군 함정 10여척이 서로 뒤엉켜 서로의 꽁무니를 물로 물리는 기동 공방전이 아침 6시경부터 오후 8시경 어둠이 내릴 때까지 계속되면서 긴장은 점점 높아져 갔다.

그러던 중 11일에는 북한의 맹렬한 정면충돌 공격에 대응해 아군 고속정이 일시에 적함의 꽁무니 충돌 공격으로 적함 4척에 손상을 입혀 퇴각시킴으로써 적의 충돌 공격에 맞대응한 공격을 처음으로 감행했다.

긴장이 점점 고조되는 가운데 13일에는 북한 해군의 사곶기지에서 어뢰정 3척이 출동해 아군 함정에 공격 기동으로 위협함에 따라 위기감이 한층 높아져 갔다.


“총 맞을 시간을 기다린 것”

“먼저 쏘지 말라고 하니까 총 맞을 시간만 기다리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15일이 되자 북한 함정이 다른 날 보다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오늘 적이 공격을 하겠구나’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30여년 이상의 해상 작전 경험에서 나오는 본능적인 감이 온거죠.”

기독교 신자인 그는 기도를 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적들이 우리를 공격하려 하고 있습니다. 2함대 장병들이 지난 6개월 동안 피나는 훈련으로 적의 도발에 대비해 왔습니다. 반드시 승리하게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간절히 소원하옵건데 한집에 한둘 밖에 없는 이 귀한 자식들을 한명도 상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남은 생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라고 말이다.

평생 그렇게 다급하고 간절하게 기도 해본 적이 없다는 그는 곧바로 “적함의 기습공격이 있을 것 같으니 각 함정은 적함에 대해 각 함별·포별 타깃을 지정 자동추적 상태로 유지하고 적의 기습사격 시에는 자위권 차원에서 즉각 대응 사격 실시하라”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이러한 지시를 내린 1분 뒤 북한 함정의 기습사격이 시작되었고, 우리 측이 즉각 대응사격을 함으로써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라며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76mm 함포와 40mm 함포, 20mm 발칸포가 비가 내리듯 포탄을 퍼부어졌죠. 갑판위의 북한 병사들은 다 죽었고 현장은 처절했습니다.” 그간 6개월 동안의 교육훈련과 매일매일 상황별로 분석하여 지시된 작전지시에 따라 지휘에 혼란이 없이 마치 훈련하는 것처럼 차분히 전투가 진행됐다.

이런 전투 상황이 장시간 계속되면 적함의 대부분을 침몰 또는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었으나 적함 4~5척이 침몰 또는 대파, 5~6척도 손상을 입고 퇴각하고 있어서 대응 사격을 14분 만에 교전을 중단하고 아군 함정들을 현장 해역으로부터 남하시켜 완충 구역 남방에 배치, 대기하도록 했다.

지속적인 공격으로 전과 확대가 가능했음에도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은 확전 금지라는 상부의 지시와 함께 대파된 함정들을 통한 패전의 실질적인 모습을 직․간접적으로 확인함으로써 우리 군에 대한 도발의지를 꺾고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한 계산된 전술이었다.

또한 우리 해군이 먼저 공격했다고 적반하장식의 북한의 억지를 사전에 차단함과 더불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교전 해역에 남겨진 적 병사들을 구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교전 시간은 14분에 불과했지만 아군 함포의 고속의 발사율과 높은 명중률을 고려하면 적 함정들의 피해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박 제독은 “6월 15일 10시경 판문점에서 장성급 회담이 열리고 있었는데 이때 북측 대표가 9시 15분에 우리 해군이 먼저 공격하여 전투가 벌어졌다고 언급했다”며 “9시 15분경에는 양측간에 교전이 시작되지도 않았던 시각으로 이를 미뤄보면 북한 해군은 9시 15분에 기습 공격하려고 계획한 것이 차질이 생겨 9시 28분에 공격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분석했다.

그는 “장성급 회담의 북측 대표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연평해전은 북한에 의한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기습공격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측의 피해도 물론 있었지만 북한측에 비하면 경미했다. 그는 “우리 병사들 11명도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는데 모두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의 수준이었다”면서 “탄환이 빗발치는데 탄창에 잼(Jam)이 걸려 순간적으로 고개를 숙여서 탄환을 피한 발칸포 사수, 총탄이 턱과 목 주위의 피부만 스쳐가 목숨을 구한 장병 등 부상자 모두가 절묘하게 죽음을 피해갔다”고 말했다. 그는 “이 모두가 간절한 기도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고 소회했다.

박 제독은 연평해전의 승리에 대해 “그동안 북한의 불바다, 핵 도발 발언 등 공갈․협박으로 인하여 은연중에 우리 장병들이 북한군에 대하여 막연한 공포심이 있었는데 이러한 전과로 인해 자신감을 갖게 했다는 게 큰 소득”이라며 “대신 북한은 패배로 우리군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고 이로 인해 체제까지 흔들릴 위험까지 안게 됐다”고 평했다.


“햇볕정책이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보다 중요하단 말인가?”

박 제독은 “연평해전 당시 교전 규칙과 작전절차가 규정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제공격 금지’라는 상부지시는 아군이 적국의 공격을 당한 후에 공격하라는 것”이라며 “이는 아군은 손발을 묶어 놓고 싸우는 형국으로 아군 장병들의 크나큰 위험과 희생을 초래할 수도 있었던 지시였다”고 그 ‘비상식성’을 지적했다.

그는 “북한 함정이 아군 함정을 공격하고 있는데 북한에 지원할 비료를 적재한 대한민국 화물선은 해주항에 입항하기 위해 연평도 근해에 정박하고 있었고 많은 국민들은 금강산 관광을 하고 있었다”며 “북한 해군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우리 장병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라며 당시 우리나라의 ´아이러니´한 상황을 되짚었다.

그는 “1990년대 ‘서울 불바다 발언’ 이후 김대중 정부때부터 지금까지 햇볕정책이 추진되어 왔는데도 불구하고 99년 연평해전과 02년 서해교전이 일어났으며 NLL 무력화를 위한 공갈 협박이 계속되고 있다”면서 “심지어 지금은 ‘6.15 민족통일 대축제’라는 이름으로 한반도기를 흔들면서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공갈·협박한 북한 인사를 광주로 불러들였고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주권, 국가로서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손상되고 있다”고 비난했다.

박 제독은 NLL의 존재에 대해 “남북관계에서 군사 위험이 완전히 소멸되기 전까지는 사실상의 군사분계선과 마찬가지”라며 “북한의 어떠한 시도와 도발에도 NLL은 고수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또 “지난해 남북 해양수산 분야 회담 때 남북 7개 항구 개방과 북한 선박의 제주해협 통과 허용, 남북 장성급 회담에서의 NLL 조정 거론, 국방 개혁 추진 등 북한의 대남 적화전략은 변하지 않고 군사 사항은 변한 것이 없다”며 “그런데도 과시적인 성과를 보이기 위한 무리한 햇볕정책 추진으로 북한의 치밀한 계획에 말려 안보 위기가 초래될 위험을 경계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합리적 보수 지식인들은 침묵하고 주체사상에 편향된 사람들만 행동하고 말하고 있다”면서 “이제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양식있는 보수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현실 참여와 행동이 필요한 때”임을 역설했다. 그는 “국민이 안심하고 살기 위해서는 안보가 선결 요건”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박정성 제독 경력>

1961년 마산 무학초등학교 졸업 (13회)
1964년 마산중학교 졸업 (13회)
1967년 마산고등학교 졸업 (26회)
1971년 해군사관학교 졸업 (25기)
1988년 중앙대학교 대학원 졸업 (경영학 석사)
1994년 국방대학원 졸업 1971 ~ 1989년 : 해상(전방)근무 및 육상 근무
◎ 해상 : 고속정, 소해정, 상륙함, 호위구축함, 구축함 등
◎ 육상 : 전방기지장, 생도훈육관, 해본/합참 전략기획장교 등
1990 ~ 1991년 : 구축함 함장(DD-925 전주함)
1991 ~ 1992년 : 818 군구조 개선 연구위원
1992 ~ 1994년 : 해군본부 작전참모부 편제처장
1994 ~ 1995년 : 국방부 전력계획관실 차장
1995 ~ 1996년 : 해군본부 참모총장 비서실장
1996 ~ 1998년 : 해군 작전사령부 제5성분전단장
1998 ~ 1998년 : 국방부 국방개혁위원회 인사/교육분과 위원장
1998 ~ 1999년 : 해군 제2함대 사령관
2000 ~ 2002년 : 해군본부 군수참모부장
2002 ~ 2003년 : 해군본부 정보/작전참모부장
2003 ~ 2004년 : 해군 군수사령부 사령관(소장 예편)
2004 ~ 2006년 :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초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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