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덜너덜해진’ 정유업계, 누구를 위해 맞았나 [기자수첩-산업IT]

오수진 기자 (ohs2in@dailian.co.kr)
입력 2023.05.19 07:00 수정 2023.05.19 07:03

지난해 대대적 '욕받이' 된 정유업계

정유업계 불황과 함께 쏙 들어간 '횡재세'

정부, '민심잡기' 몰두 말고 이해도부터 갖춰야

서울 시내의 한 주유소에 주유건들이 꽂아져있다. ⓒ데일리안

“기름값이 오르면 항상 저희가 죄인이죠.”


기름값이 오르기 시작하면 정유사들이 전면에서 비난의 화살을 맞는 건 통상적인 일이었다. 치솟는 물가에 대한 분노를 풀 곳이 필요한 국민들과 그 분노를 딴데로 돌려야 할 정부로서는 ‘기름 파는 정유사들이 기름값 인상의 주범’이라는 단순한 논리를 갖다 쓰기 편했을 터다.


특히 지난해 치솟는 기름값에도 유례없는 호황을 맞았던 정유업계는 대대적 ‘욕받이’가 됐다. 실생활과 밀접한 기름값이 오르자 국민들의 체감 물가 부담이 상승해 민심은 들끓고, 정치권은 이를 잠재우기 위해 ‘횡재세’를 언급하며 정유사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경기침체로 힘든 상황에서 자기네들끼리 ‘돈잔치’하는 정유사들이 아니꼽단 식이었다.


지난해 상반기 정유사들의 합산 영업이익은 12조3000억원이다. 이에 여야를 막론하고 법인세 외에 추가로 세금을 거둬야 한다며 상당히 적극적으로 나섰다. 지나치게 많은 이익을 낸 정유사들에 부담금을 징수해 난방비 폭탄으로 고통 받는 국민에게 되돌려줘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여기에 ‘정유사 도매가 공개’도 정치권의 ‘민심잡기’ 카드 중 하나로 사용됐다. 지난해 7월 실시한 유류세 인하 조치가 정유사나 주유소의 마진으로 흡수됐다고 보며, 엄격한 모니터링을 통해 국내 정유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정유사 도매가를 공개해야 한단 게 정부의 입장이었다.


당시 정유업계는 대한민국 산업 중 어느 곳이 원가를 까놓고 장사를 하느냐며 반발했다. 정유업계만 콕 찝어 원가를 공개하겠다하는 것은 우리 헌법의 시장 경쟁 원칙에 위배된다는 논리였다.


지난해 정유업계의 속앓이는 말이 아니었다. 사이클을 타는 업종 특성상 호황때 번 돈으로 다가올 불황에 대비해야 할 마당에 번 돈을 불로소득 취급 하며 토해내라니 울화가 치밀 일이다.


백 번 양보해 마진을 아예 없애더라도 기름값 인하로 이어지는 체감도가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수준에 도달할 리도 없었다. 정부가 유류세 인하로 생색을 냈지만 여전히 세금이 기름값의 민감도를 증폭시키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국내 휘발유에는 세금이 50% 이상 포함돼, 유가가 10% 인하되더라도 실질 가격하락폭은 5% 이내에 그친다. 또 유류세는 정액 비중이 커 제품 가격이 내려갈 수록, 유류세 비중이 커지는 구조라 국제 제품 가격 하락이 크더라도 국내 제품가격 체감이 적은데 영향이 미친다. 국내 휘발유 가격 중 유류세 비중은 현재 약 60%다.


어쩌면 다행일까. 올해를 기점으로 상황이 반전됐다. 지난해 4분기를 기점으로 정유 업황이 꺾인 것이다. 정유 4사가 정유사업에서 도합 1조2932억원의 적자를 냈다. 올 1분기도 정유사업만 놓고 보면 실적은 그리 좋지 못하다. 정유 4사의 전년 대비 영업이익은 평균 79%나 감소했다.


자, 이제 횡재세의 반대 논리를 적용할 때다. 업황 호조로 벌어 들인 돈이 ‘횡재’라면 업황 악화로 잃은 돈은 ‘재난’인가. 정유사들이 낸 적자를 재난지원금 명목의 혈세로 메워줘야 하는가.


안타깝게도 논박을 주고받을 상대가 사라졌다. 정유사 실적에 대한 정치권의 관심은 싸그리 사라졌다. 횡재세나 정유사 도매가 공개를 외쳐 대던 정치인들은 다 어디 갔는지 모를 일이다.


이제 한숨은 돌렸으나, 정유업계에 호황기는 분명 다시 찾아올 것이다. 정유업계는 또 다시 정치권의 민심 잡기에 동원되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에 떨어야 할 수도 있다. 기업이 호황을 두려워해야 한다니 개탄스런 일이다. 언제쯤 정치권이 ‘포퓰리즘’으로 뒤덮인 색안경을 벗어 던질 수 있을지 아득하기만 하다.

오수진 기자 (ohs2in@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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