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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진화한 ‘사인 훔치기’가 불러올 퇴화

김태훈 기자 (ktwsc28@dailian.co.kr)
입력 2020.01.18 07:00 수정 2020.01.17 23:03

메이저리그(MLB), 전자기기 사인 훔치기 사건으로 격랑

승리 지상주의와 첨단 장비의 부적절한 조합 뒤 검은 그림자

휴스턴 애스트로스 홈구장 미닛 메이드 파크. ⓒ 뉴시스 휴스턴 애스트로스 홈구장 미닛 메이드 파크. ⓒ 뉴시스

“걸리는 사람이 바보” “들킨 사람도 바보”라는 인식이 팽배한 때도 있었다.


야구판에서 선수 혹은 코칭스태프의 눈을 통한 사인 훔치기는 과거나 지금이나 암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는 의견이 우세하다. 출루하면 상대팀 포수나 벤치의 사인을 간파해 타자에게 구종을 전달하거나 도루 시도 여부를 결정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를 의식한 투수와 포수는 사인 패턴에 변화를 준다. 포스트시즌에서는 더욱 복잡해진다.


이 정도까지는 경기의 일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메이저리그(MLB)에서 발각된 첨단 전자기기를 이용한 ‘사인 훔치기’는 용인 범위를 넘어섰다.


2017 월드시리즈 우승팀 휴스턴 애스트로스는 외야에 설치된 고성능 카메라로 상대 포수 사인을 훔쳐 타자에게 구종과 코스를 그들만의 방식대로 전달했다. 타자 몸에 버저를 부탁해 타석에 들어서 투수들의 볼배합을 소리로 전달받았다는 의혹도 일고 있다. 사인 훔치기는 첨단 전자기기를 이용할 정도로 진화했고, 매우 조직적으로 자행됐다.


도덕성과 신뢰에 심각한 타격을 가한 사인 훔치기의 파장은 크다.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단장과 감독이 MLB 사무국으로부터 중징계를 받았고, 구단으로부터 해고됐다. 사인 훔치기 진상 조사 대상에 올라있는 2018 월드시리즈 우승팀 보스턴 레드삭스는 사무국의 징계 발표도 되기 전에 주동자로 꼽히는 알렉스 코라 감독을 해고했다. 휴스턴 시절 선수였던 카를로스 벨트란은 데뷔전도 치르지 못한 채 뉴욕 메츠 감독 자리에서 내려왔다.


충격 속에도 일각에서는 “그래도 월드시리즈 트로피는 남지 않느냐”는 말도 나온다. 스포츠의 출발점인 공정의 가치를 경시하는 인식에서 비롯된 말이다. 스포츠라면 승리 이전에 정정당당한 승부가 우선 되어야 한다. ‘페어플레이’ ‘스포츠맨십’ 등 너무 익숙한 단어지만 현재 프로 스포츠 현실에서는 유리돼 화석화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진화된 ‘사인 훔치기’가 불러올 프로 스포츠의 퇴행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새어나온다.ⓒ 뉴시스 진화된 ‘사인 훔치기’가 불러올 프로 스포츠의 퇴행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새어나온다.ⓒ 뉴시스

현재까지 드러난 조사 결과만 놓고 볼 때, 휴스턴-보스턴과 상대한 팀은 분명 피해를 입었다. 패배한 선수들의 좌절감은 더욱 크고, 우승한 선수들도 자랑스럽게 우승 반지를 꺼내기 껄끄럽다. 가장 큰 피해자는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고 야구장을 찾았던 관중들과 나름의 분석과 예상을 즐기며 TV(인터넷) 중계를 시청했던 야구팬들이다. 뒤통수를 세게 맞고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진화된 ‘사인 훔치기’가 불러올 프로 스포츠의 퇴행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벌써부터 곳곳에서 새어나온다.


박진감과 짜릿함, 극적인 스토리가 선사하는 감동과 여운이 남아야 할 그라운드 안팎에서는 불신이 촉발하는 불필요한 대립과 갈등으로 소모적 논쟁이 점화될 수 있다. 사인 훔치기와 같은 부정이 횡행하는 가운데 “(스포츠 게임을)안 본 사람이 승자”라는 말이 나온다면 프로 스포츠의 수명은 예측하기 어렵다. 한국의 KBO리그도 MLB의 사고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면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첨단 기술의 발달이 승리 지상주의에 빠진 인간과 만나 부정의 결과물을 양산한다면 더 큰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 급속도로 발전하는 기술 만큼이나 승부를 가르는 스포츠에 종사하는 직업인들의 윤리 의식도 함양해야 한다.


“한 번 잃은 명성을 다시 회복하기는 매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LA 다저스 레전드 허샤이저 말대로 불신을 걷어내고 다시 신뢰를 받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팬들이 없으면 한낱 공놀이에 불과할 ‘프로’ 야구가 팬들을 배신한 혹독한 대가를 치를 수 있다는 경고다. 자타공인 세계 최고의 야구 무대인 메이저리그가 현 시대에 맞는 특단의 효과적인 대책을 내놓을 때다.

김태훈 기자 (ktwsc28@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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