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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호민(豪民)을 국회로 불러들인 문희상

정도원 기자 (united97@dailian.co.kr)
입력 2019.12.18 04:00 수정 2019.12.19 11:14

예산안 며칠만에 이번엔 선거제·공수처 모의

가만 있으면 호민없는 나라, 죽은국민 아닌가

국민을 두려워할 줄 알고 '날치기' 단념해야


일단의 국민들이 지난 16일 오후 국회본청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공수처법 선거법 날치기 저지 규탄대회'에 참석했다가 국회본청 출입구 앞에 계속 머무르며 선거법·공수처법 반대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일단의 국민들이 지난 16일 오후 국회본청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공수처법 선거법 날치기 저지 규탄대회'에 참석했다가 국회본청 출입구 앞에 계속 머무르며 선거법·공수처법 반대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조선 중기의 유학자 허균(許筠)은 '호민론(豪民論)'에서 백성을 항민(恒民)·원민(怨民)·호민(豪民)의 세 부류로 나눴다.


이뤄진 것을 즐거워해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면서도 그저 따르는 백성은 항민.


모질게 빼앗겨 살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부서지도록 집안의 소출을 다 바치면서도 한없는 요구를 따르지 못해 시름하고 탄식하며 윗사람을 흘겨보는 백성은 원민이다.


허균은 "항민이나 원민은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고 했다.


문제는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을 숨긴 채 천지간을 살피다가 혹 변고라도 터진다면 뜻을 실현하고자 나서는 '호민'이라는 것이다.


허균은 "호민이야말로 (권력자가) 몹시 두려워해야할 사람"이라며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며 일의 형세가 편승할만한가 노리다가, 팔을 휘두르며 논두렁 위에 서서 한 차례 부르짖으면 원민은 미리 모의하지 않고서도 소리만 듣고 모여들어 함께 외치며, 항민도 그제서야 호미와 고무래를 들고 따라와 무도한 자들을 쳐죽인다"고 했다.


당대 조선이 이미 국가체계가 문란해져 백성의 삶이 도탄에 빠졌는데도 위정자들이 전혀 백성을 두려워 않고 사리사욕만 챙기며 가렴주구에 골몰하는 탓을 허균은 호민이 없는 것에서 찾았다.


허균은 "우리나라는 백성이 착해 협기가 없다"며 "홍수·화재·호환보다 백성을 더 두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백성을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는 까닭은 이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마구 거둬들이는 것이 극에 달해 시름과 원망이 심한데도, 윗사람들이 태평스러운 듯 (백성을) 두려워할 줄 모르니, 우리나라에 호민이 없기 때문"이라며 "백성 다스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 두려워할만한 형세가 돼야 전철을 고치고 나라를 그런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근 일단의 성난 국민들이 국회 경내로 들어와 선거제·공수처 날치기 반대를 외치며, 혹 좌파독재 타도와 문재인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고 또 한편으로 문희상 국회의장을 끌어내리겠다고 난장판을 벌였다며 정치권이 온통 벌집 쑤신 듯 하다.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 일어난 것은 맞다. 다만 의아한 것은 '그러면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느냐?'는 것이다. 국민을 그리 만만히 여기고 있었는지가 그저 놀랍다.


여당과 여당에 협조한 정당들은 500조 원 예산안을 예결위원장도 제쳐놓은 채 밀실야합했다. 국회의장은 반대토론을 못하게 가로막고, 제1야당의 수정안은 정부관료의 '부동의' 한 마디 입을 빌려 폐기한 뒤, 의사봉을 두드려 통과시켰다.


국민의 지갑과 호주머니를 털어 '도둑질'을 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여기에 "화장실로 달아나 의사봉을 넘겼다"는 말까지 나오게 만들고서도 아무런 변고가 없을 줄 알았단 말인가.


국민을 얼마나 '착하게' 봤으면, '협기가 없다'고 여겼으면 그런 발상이 나왔을까.


문희상 국회의장이 지난 10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4+1 협의체'가 상정한 2020년도 예산안을 심재철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항의하는 가운데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문희상 국회의장이 지난 10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4+1 협의체'가 상정한 2020년도 예산안을 심재철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항의하는 가운데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이렇듯 참담한 일을 저지르고서 며칠 지나지도 않아 이제는 또 선거제와 공수처 '날치기'를 모의하고, 정체불명의 '4+1 협의체'에서 합의안만 완성되면 바로 상정하겠다고 국회의장이 공공연히 나서서 예고하니, 예산안 때 한 번 당했던 국민들이 가만히 있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 될 수 있다.


국민을 조선시대 백성 보듯해 국회에서 무슨 범죄나 날치기를 저질러도 그저 부림만 당하겠거니, 기껏해야 시름하고 탄식하며 흘겨볼 뿐 네가 무슨 행동에 나서겠느냐고 항민이나 원민 다루듯 하지 않고서야, 이렇듯 무도한 일을 계속해서 저지르고 모의할 수 있겠는가.


2년 반 임기를 소득주도성장 여섯 글자로 국민이 먹고살 길을 막아놓고, 자영업이 줄줄이 망해 빈 점포가 난무하며, 산업은 도산 일색이라 공단마다 임대 현수막이 나부끼고, 근로자 살 원룸은 열에 아홉이 공실이라 "IMF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는 절규가 나온다고 한다.


이런 시국에서도 태평스러운 듯 국민 두려워할 줄을 모르다가, 호민이 들고일어나고 원민·항민이 뒤를 따라외쳐대니 그제서야 벌에 쏘인 듯 놀라는 모습이 가관이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이런 꼴을 당하자 이례적으로 '입장'까지 내서 "국회가 유린됐다"며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일단의 국민들이 입법기관인 국회의 권능을 무시하고 그 경내로 침입해 들어와 난동을 벌인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인 것은 옳다.


하지만 "여야 정치인 모두가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물타기하지 말라. 문 의장 자신만 의회주의 수호, 불편부당 자세만 유지했더라도 일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 의장은 "매일같이 모욕적이고 참담한 심정으로 잠을 이룰 수 없다"고 밝혔지만, 정말로 모욕을 당한 듯 참담한 심정의 국민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문 의장은 정확히 알아야 한다.


허균은 "백성 다스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 두려워할만한 형세가 돼야 전철을 고치고 나라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국민 보기를 두려워할 줄을 몰랐던 자들이 이번에 호민이 들고 일어난 탓에 비로소 전철을 고치고 선거제·공수처 다루기를 달리 해야, 우리나라의 의회주의가 지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정도원 기자 (united97@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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