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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4주년, 건국 71주년 되돌아보는 이승만 리더쉽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19.08.15 16:35 수정 2019.08.15 16:35

<서정욱의 전복후계> 항상 '최초'가 따라다니는 뛰어난 선각자

자유민주주의에 철저한 원칙주의자

<서정욱의 전복후계> 항상 '최초'가 따라다니는 뛰어난 선각자
자유민주주의에 철저한 원칙주의자


지난 7월 18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특별시의회 의원회관에서 '미안하다 청년들아' 이승만 서거 54주년 추모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데일리안 홍금표 기자 지난 7월 18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특별시의회 의원회관에서 '미안하다 청년들아' 이승만 서거 54주년 추모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데일리안 홍금표 기자

1. 왜 '지금' 이승만인가?

“역사가는 '사실'의 비천한 노예도 아니고, 난폭한 지배자도 아니다. 역사가와 사실의 관계는 평등한 관계, 주고받는 관계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

랑케의 실증사학에 반기를 든 E. H. Carr의 말이다. 그렇다. 모든 역사는 '주관적 기록'이다. 어떤 역사도 과거를 '실제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역사는 대중의 찬사를 받고자 쓰는 '문학'이 아니라, 영원한 지식의 보고로 남기 위해 이루어진 사실의 집적인 '과학'이다(투키디데스). 이 말은 아무리 역사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 '자신의 입장'에서 과거를 해석한 것이라 해도, '팩트'를 떠나서는 역사학이 성립할 수 없다는 의미다.

반만년 역사상 가장 빛나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건국한 우남(雩南) 이승만, 역사 속 수많은 인물들처럼 그 또한 많은 업적과 과오를 동시에 남겼다.

"이승만은 미국이 한반도를 분할 통치하기 위해 데려온 일종의 퍼핏(puppet), 괴뢰다. 당연히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도올 김용옥)."

그런데 왜 유독 그에 대해서만 역사는 박한 평가를 하고 있는가? 왜 유독 그에 대해서만 역사는 그의 '공과(功過)'를 균형있게 보지 못하고 '과(過)'만 부각하는가? 왜 유독 그에 대해서만 역사는 '팩트'는 무시하고 어설픈 '해석'만 난무하고 있는가?

'올바른 역사 인식의 공유'야말로 선진통일조국 건설의 초석이다.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 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다.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의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동맹의 토대가 됐다(문재인 대통령)"

좌(左)든 우(右)든 위와 같이 왜곡되고 편향된 역사인식으로는 결코 미래의 통합을 이룰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첫 번째 동기다.

다음으로 우리 민족 최대의 화두는 누가 뭐래도 '통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통일원칙이 무엇인가? 적화 통일인가? 중도 통일이나 중립화 통일인가? 아니다. 우리의 통일원칙은 자유민주주의 통일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결국 자유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 바로 '통일이념'이 되는 것이다.

우남을 모르고 '건국이념'을 논하는 것은 그 자체로 넌센스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두 번째 이유다.

"前事之不忘 後事之師也(전사지불망 후사지사야)", "지난일을 잊지 않는 것이 나중 일의 스승이 될 수 있다."

사마천이 '진시황 본기'에서 한 말로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천고(千古)의 명언이다. 그런데 오늘날 젊은 세대, 특히 4.19 이후 세대의 우남에 대한 인식은 어떠한가?

"독립운동 분열의 원흉이다." "6.25 당시 서울을 버리고 한강 다리까지 폭파해버린 채 도망갔다." "친일파만 기용하고 독재와 부정선거로 쫓겨났다." "결국 대한민국은 기회주의만 득세하고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다."

이러한 종북 좌파의 편향된 역사교육만 판친다면 과연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자라나는 젊은 세대에 조금이나마 더 우남의 본모습을 보여주어 자랑스러운 나의 조국에 자부심을 갖게 하자.'

이것이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마지막 이유다.

2.항상 '최초'가 따라다니는 뛰어난 선각자

우리나라 박사학위 1호(1910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이라는 논문으로 철학 박사),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과 대통령 등··

그는 항상 '최초'가 따라다니는 뛰어난 선각자였다. 그는 누구보다 탁월한 혜안과 선구적인 안목으로 민족 교육과 국제외교를 통한 독립을 역설한 선각자였다.

1897년 배재학당을 졸업할 때 졸업생 대표로 영어로 연설한 '한국의 독립', 1904년 옥중에서 저술한 '독립정신', 그리고 1941년 일본의 미국 침공을 예언한 '일본내막기 (Japan Inside Out)' 등··

그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를 떠나 그는 정말 개화된 의식과 국제정세를 읽는 능력만은 독립운동가중 독보적인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다. 이중 그가 아직 양반 사회의 서슬이 시퍼렇던 20C 초 옥중에서 쓴 '독립정신'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세상에서 이르는 바 높다, 귀하다, 천하다 하는 것은 인심으로 질정(質定)한 형편을 구별함이려니와 실로 천리(天理)를 볼진대 그 소위 귀하고 높다는 자나, 약하고 천하다는 자나 이목구비와 사지백태(四肢百態)는 일반으로 타고 나서 더 하고 덜한 것이 없나니 이는 하늘이 다 각기 제가 제 일을 하며 제가 제 몸을 보호할 것을 일체로 품부(稟賦)하심이라."

한편 당시 독립운동은 그가 강조한 외교독립론외에도 일본통치하의 민족자치론, 계몽을 통한 실력양성론, 무장투쟁론, 민중혁명론 등 참으로 다양하였다. 역사란 항상 지나고 나면 명백한 답이 보이지만 당 시대를 살아야 했던 사람들에게는 마치 안개 자욱한 길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진 것같은 암담함 뿐이었다.

그의 외교독립론은 무력항쟁을 부르짖는 이른바 '무력파'에 의해 나약한 문치론으로 비판받았다. 특히 그가 국제연맹에 조선을 일제로부터 해방시켜 위임통치해 줄 것을 청원한 사실은 무력파들로 하여금 그를 탄핵까지 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 아니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은 자란 말이오."

단재 신채호가 그의 위임통치 청원에 대해 한 비판이다. 그러나 이후의 현실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우리의 독립은 결코 일본과의 타협이나, 실력양성, 무장투쟁, 민중혁명에 의해 달성된 것이 아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간접 원인은 되었겠지만, 직접적 독립의 계기는 2차 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였다. 결국 그가 강조한 '외교독립론'이야말로 최고의 혜안이었던 것이다.

누구나 모든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밖에 보지 못한다. 필자는 우남이야말로 보고 싶지 않은 현실까지도 직시하면서 민족의 나아갈 바를 밝혀준 진정한 선각자로 평가한다.

3.자유민주주의에 철저한 원칙주의자

미국(공화제, 연방주의, 천부인권), 프랑스(자유, 평등, 박애), 중국(인민민주 독재, 민주집중제) 등 어느 나라 어느 체제를 불문하고 모든 국가는 그 나라의 기초이념 즉, 건국이념이 있다.

'애국심', 즉 '나라사랑'이란 다른 별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건국이념에 가장 충실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나라사랑'인 것이다.

우남(雩南), 몽양(夢陽), 백범(白凡). 해방 정국의 세 명의 걸출한 지도자다. 이중 우리의 건국이념인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가장 충실한 지도자는 누구인가?

먼저 당시의 시대 상황부터 살펴보자. 주지하다시피 해방의 환희와 감격은 온 나라를 뒤덮었지만 냉엄한 국제 현실은 결코 우리에게 새로운 통일국가 건설을 허락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점령군으로 여기며 행동한 미군이 서울에 들어와 처음 한 일은 총독부 건물에서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한 일이었고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 역시 다르지 않았다.

결국 당시 해방정국은 구심점을 형성하지 못하고 좌우 대립으로 치달리고 있었는데, 처음 미국은 철저한 반공반소주의자인 그가 귀국하면 대소 타협정책에 지장을 준다고 판단하여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소련이 북한의 소비에트화에 착수했을 뿐 아니라 남한까지 좌익에 의해 장악되자 미국은 강력한 반공지도자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그는 임정의 초대 대통령이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백범도 마찬가지다)

"나는 앞으로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일하겠거니와 싸움을 할 일이 있으면 싸우겠다. 그러나 여러분, 4000년의 우리 역사가 어둠에 묻혀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이 불민(不敏)한 탓이었다. 그중에서도 나와 같이 나이 많은 사람들의 잘못이 컸다. 그것은 내가 책임지겠다. 여러분은 젊기 때문에 그 책임이 적다.

글/서정욱 변호사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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