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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노사 관계와 복지는 ‘협의’와 ‘합의’로 완성

이석원 객원기자
입력 2018.12.22 05:00 수정 2018.12.21 07:59

<알쓸신잡-스웨덴㉘> 노사와 정부 머리 맞댄 살트셰바덴 협약

노조는 고용 유연성 수용하고, 기업은 노동자 복지 극대화 약속

<알쓸신잡-스웨덴㉘> 노사와 정부 머리 맞댄 살트셰바덴 협약
노조는 고용 유연성 수용하고, 기업은 노동자 복지 극대화 약속

살트셰바덴 그랜드 호텔. 지금도 발렌베리 그룹이 소유한 이 호텔 3층에서 역사적인 살트셰바덴 협약이 이뤄졌다. (사진 = 이석원) 살트셰바덴 그랜드 호텔. 지금도 발렌베리 그룹이 소유한 이 호텔 3층에서 역사적인 살트셰바덴 협약이 이뤄졌다. (사진 = 이석원)

스톡홀름 슬루센(Slussen) 역에서 살트셰바난(Saltsjöbanan)이라는 경전철을 타거나 시내버스를 타고 30분 쯤 동쪽으로 가면 나오는 아름다운 호변 동네가 있다. 살트셰바덴(Saltsjöbaden)이다. 발트해로 나가는 길목이다. 시내에서 제법 떨어져 있는 곳임에도 아름다운 풍광 때문에 일부러 여기까지 산책을 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살트셰바덴 호수에 줄지어 정박해 있는 요트들을 보면 이 동네가 예사 동네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은 들면서 산책의 부담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스웨덴 대부분이 그렇듯 이 고급스런 풍광 속에서 마시는 맥주는 집 앞 작은 바에서 마시는 것이나 가격 차이도 없는 것을.

그런데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아름다운 호수 풍광과 맥주에만 있지는 않다. 바로 이곳 살트셰바덴 그랜드 호텔에서 ‘스웨덴 모델’의 기본 정신으로 통하는 노동자와 사용자와 정부 합의인 ‘살트세바덴 협약(Saltsjöbadsavtalet : the Saltsjoebad agreement)’이 탄생했다. 즉 살트셰바덴은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스웨덴의 노사 관계와 그를 바탕으로 한 복지가 시작된 곳이다.

살트셰바덴 협약은 사상 최악의 노사 관계 속에서 태어났다.

1929년 미국의 대공황은 1930년 말 스웨덴에도 해일처럼 밀려왔다. 수출 주도형 산업의 비중이 강한 스웨덴은 특히 철광석 수출에 치중했는데 세계 경제 위기로 인해 철광석 수출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노동자들을 길거리로 내몰리기 시작했다. 대량 해고와 직장 폐쇄 등으로 가뜩이나 먹고 살기 힘든 스웨덴의 노동자들은 더욱 열악한 환경에 내던졌다.

이제 스웨덴 각 도시의 길거리에는 노동조합원들만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학생과 부녀자들은 물론 노인들과 배고픔에 지친 어린 아이들까지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다가 일은 크게 터졌다. 1931년 5월 스톡홀름에서 북쪽으로 60여 km 떨어진 오달렌(Ådalen)의 한 제재소에서 파업하던 노동자를 지지하던 3000여명의 시위대에게 군대가 발포했다. 스웨덴 역사가 ‘오달렌 사건’으로 기억하는 일이다. 이 사건으로 임산부를 포함한 5명의 시위대가 사망했다. 불붙은 기름에 물을 부은 격이 됐다.

오달렌 5명의 죽음은 결국 이듬 해 총선에서 사회민주노동당의 집권을 가능하게 했다.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하는 사민당이 집권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단독 정부 구성이 안됐다. 사민당은 보수성향의 농민당(중앙당의 전신)과 연정했지만 시민들의 불만을 해소해 주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기업의 편을 들지도 못했다.

살트셰바덴 그랜드 호텔 뒷쪽 발트해로 나가는 바다의 시작은 화려한 요트들의 정박지다. 스톡홀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사진 = 이석원) 살트셰바덴 그랜드 호텔 뒷쪽 발트해로 나가는 바다의 시작은 화려한 요트들의 정박지다. 스톡홀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사진 = 이석원)

페르 알빈 한손 총리는 노조와 사용자들의 타협의 테이블을 계속 만들었지만 결론도 없이 갈등만 이어졌고, 시민 삶의 피폐는 가시지 않았다. 노사 문제에 정부가 나서는 것을 꺼렸던 건 기업뿐만이 아니라 노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더 이상 정부의 개입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고, 발렌베리 가문에서 먼저 사민당을 불러들였다.

발렌베리 그룹의 총수는 재무장관 에른스트 비그포르스에게 자신의 휴양지에 테이블을 마련할 테니 담판을 짓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그 자리에 LO(스웨덴 노조연맹)와 사용자 대표인 SAF(스웨덴 사용자연합), 그리고 사민당이 모여 스웨덴의 미래를 결정한 것이다.

이 협약에는 노동자와 사용자 모두가 엄청난 희생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았다. 비그포르스는 LO에 ‘고용의 유연성’을 요구했다. 그리고 생산성의 극대화에 협조할 것도 당부했다. 그리고 기업에게는 최상의 일자리와 노동 복지를 요구했다. 또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지만 해고된 노동자를 책임지게 한 것이다. 그리고 최고 85%에 이르는 소득세도 내게 했다.

결국 고용과 해고가 유연하지만, 그에 대한 기업과 정부의 책임을 무한하게 한 이른바 ‘스웨덴 모델’이 태동하게 된 것이다. 바로 저 하얀색 멋진 호텔의 3층에서.

노동자와 사용자와 정부를 뜻하는 노사정이라는 말은, 한국에서는 마치 보통 명사처럼 일상적으로 쓰인다. 한국에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라는 것이 1998년에 발족했으니 그 역사가 20년이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위원장은 장관급이다. 위원장의 직급이나 참석하는 사람들을 봐도 ‘끗발’ 대단한 기관임은 분명하다.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 경제의 가장 큰 세 축인 노동자와 사용자, 그리고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하고 타협하고 합의해서 어려운 문제를 풀어나가자는 건데, 그런데 도대체 이게 제 역할을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스웨덴의 복지와 최고의 노동 조건, 그리고 최상의 기업 환경은 어느 한 쪽의 노력이나 희생에 의해서 탄생한 것이 아니었다. 노조와 기업의 성의 있는 협의와 사민당 정부의 중재, 그리고 그를 통해서 도출한 합의가 빚어낸 작품이다.

이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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