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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을 맞아 되돌아보는 세종의 리더쉽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18.10.09 11:05 수정 2018.10.09 17:08

<서정욱의 전복후계> 통합의 정치로 부국부민 추구했던 성군 세종

증오와 갈등만 양산하는 독선과 불통의 정치, 언제까지 봐야 하나

<서정욱의 전복후계>
통합의 정치로 부국부민 추구했던 성군 세종
갈등 양산의 독선 정치, 언제까지 봐야 하나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자료사진). ⓒ데일리안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자료사진). ⓒ데일리안

"백성들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새로운 글자가 만들어진다면 내 눈이 먼다 해도 괜찮소."

"우리나라의 말소리는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할 때가 있어도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지라.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 여덟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쉬이 익혀서 날마다 편하게 하게 할 따름이니라."

1989년 세계 문맹퇴치에 공헌한 자에게 '세종대왕상'을 수여할 정도로 세계 2900여 종의 언어 중 최고의 평가를 받는 자랑스런 문화유산 훈민정음.

로마문자·이집트문자·중국문자 등 수많은 문자가 있지만 그 창제과정과 원리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유일한 문자 훈민정음.

자음과 모음 모두 입 안의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따 만든 완전한 표음문자이자 음절의 첫 자음인 '초성', 모음인 '중성', 끝 자음인 '종성'을 한 칸에 담는 세계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획기적이고 창조적인 훈민정음.

572돌 한글날을 맞아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운 민족사의 가장 위대한 성군, 세종의 리더쉽을 다시 한번 되새겨 오늘의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는다.

1. 태종의 선택

평생에 걸쳐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많은 꿈을 꾸었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노력한 위대한 왕 세종, 태종의 업적을 계승한 수성(守成)의 군주이자 조선의 정체성을 확립한 창업(創業)의 군주 세종.

그의 시대 전체를 한 눈에 바라보는 것은 천 송이의 꽃이 피어있는 화단을 손바닥만한 수첩에 그려내는 것처럼 어렵다. 한마디로 기적같은 그의 즉위는 조선의 축복이자 우리 한민족 전체의 천운이었다.

"행동이 지극히 무도(無道)하여 종사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대소 신료가 청하여 부득이 세자를 폐하고, 대신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며 치체(治體)를 알아서 매양 큰일에 헌의(獻議)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기에 왕세자로 삼는다."

1418년 태종이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자의 폐위를 결정한 것은 양녕의 기행(奇行)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셋째 아들 충녕에 대한 믿음이 큰 작용을 했다.

태종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국왕의 자리는 장자세습이라는 원칙보다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이제 겨우 반석에 올려놓은 조선왕조가 굳건한 뿌리를 내리려면 충녕과 같은 능력 있는 왕이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내가 나라를 부탁해 맡김에 사람을 잘 얻었으니 산수간에 노니기를 이처럼 걱정없이 하는 자는 천하에 나 한 사람뿐이다. 고금을 통틀어도 나 한 사람뿐일 것이다."

두 달 뒤 태종은 비록 군권을 제외한 조건부 양위였지만 전격적으로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앉는다. 이후 재위 4년만에 태종의 사망으로 세종은 전권을 행사하게 되는데…….

"토목공사는 백성들이 심히 괴롭게 여기는 일이지만 국가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이제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일은 내가 다 감당하겠다. 세자가 즉위한 다음에는 한줌 흙이나 한 조각 나무의 공사라도 하지 않게 하여 민심을 얻게 하겠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열흘 전에 태종이 한 말처럼, 그는 태종이 만들어 놓은 정치적인 안정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자료사진). ⓒ데일리안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자료사진). ⓒ데일리안

2. 호학(好學) 군주

정치·경제·국방·문화 등 다방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아 수준 높은 민족문화의 창달과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여 민족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대를 열었던 세종.

그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임금일 수 있었던 건 한마디로 그가 '공부하는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공자처럼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수불석권(手不釋卷)과 자강불식(自强不息)의 자세로 역사를 통해 흥망의 이치를 터득하고자 노력했다. 이는 임금과 신하가 함께 공부하는 '경연' 횟수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선대인 태종 때는 재위 18년 동안 60여 회에 불과했지만 그는 32년간 1898회나 진행했다.

또한 그는 성리학 뿐 아니라 천문·지리·역법에도 통달해 오히려 학사들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그의 공부법은 한마디로 '질문하고 토론하라'다. 1만800여 쪽에 달하는 '세종실록'에서 그의 표현 중 가장 많이 나오는 말 중 하나는 "경들은 어찌 생각하시오"다. 바로 질문을 던져 상대방의 생각을 이끌어 내고 토론을 통해 지혜를 모으는 방식이다.

"고기는 씹을수록 맛이 난다. 그리고 책도 읽을수록 맛이 난다. 다시 읽으면서 처음에 지나쳤던 것을 발견하고 새롭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경서는 모두 100번씩, 경서 외에 역사서와 기타 다른 책들도 꼭 30번씩 읽었는데 바로 반복학습의 중요성이다.

"무릇 잘된 정치를 할려면 반드시 전대의 잘 다스려진 세상과 어지러운 세상의 역사가 남긴 자취를 보아야 할 것이다."

선현의 지혜를 신뢰했던 그는 유학의 경전과 사서(史書)를 뒤져 이상적인 제도를 연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제도개혁 등 직접 실행에 옮겼다. 특히 그는 집현전을 통해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등 당대의 수재들에게 연구를 분담시켜 윤리·농업·지리·측량·수학·약재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편찬하고 관료·조세·재정·형벌·군사·교통 등에 대한 제도들을 정비했다.

집현전은 학문 발전과 문화 부흥의 산실이었는데,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이곳에 모였으며, 임금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학문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애민(愛民) 군주

"내가 깊은 궁중에 있으므로 백성들의 일을 다 알 수 없다. 만일 이해관계가 백성들에게 절실한 것이 있으면 너희들은 마땅히 모두 아뢰라."

"백성들에게 누명을 씌운 관리는 엄벌하되, 임금에게 험담한 백성은 용서하라."

"백성이 나를 비판한 내용이 옳다면, 그것은 나의 잘못이니 처벌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설령 오해와 그릇된 마음으로 나를 비판했다고 해도 그런 마음을 품도록 한 내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여민동락(與民同樂)', '생생지락(生生之樂)'.

그의 정치철학은 한마디로 하늘이 내린 백성(天民)과 즐거움을 나누고, 백성들이 삶의 기쁨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는 인(仁)과 덕(德)을 갖추고, 나라의 근본이 되는 백성을 위해 애민정신으로 정치를 펼쳐 나가는 것이 참다운 군주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 생각했다.

"이것이 오직 백성을 위해 필요하고 쓸모 있는 것이냐?"

그가 어떤 정책을 시행할 때의 절대 기준인데 그만큼 그의 마음은 오로지 백성을 향해 있었다.

"올해는 유난히 더위가 심하구나. 유배형 이하의 죄수는 모두 사면하라. 석방되지 않은 죄수는 옥에서 더위 때문에 죽게 될까 내 마음이 몹시 근심된다. 죄수들이 병나지 않게 잘 돌봐주어라."

"진실로 차별 없이 만물을 다스려야 할 임금이 어찌 양민과 천인을 구별해서 다스릴 수 있겠는가."

그는 백성들에게 자주 은전을 베풀고, 사면령을 빈번히 내렸으며, 겨우 7일에 불과하던 관비의 출산휴가를 100일로 늘리는 등 애민 정책을 지속했다. 오로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강한 조선, 화합의 조선, 홀대 받는 곳 없는 조선을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그의 정책은 오늘날 지도자들도 반드시 벤치마킹 해야 할 것이다.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자료사진). ⓒ데일리안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자료사진). ⓒ데일리안

4. 민주적 독재자

"토론하고, 토론하고, 또 토론하면서도 결론은 내가 내린다."

"소수의 의견도 끝까지 경청하되 한 사람의 말만 가지고 결정해서는 안 된다."

그의 정치적 리더쉽은 한마디로 '민주적 독재자'다. 그는 어떠한 국가의 중대사를 논할 때도 신하들과 격의 없는 논쟁을 벌였지만 항상 최종 결론은 스스로 내렸다.

그의 의사결정은 회의를 통한 것이 63%, 명령이 29%로, 세조의 명령이 75.3%, 회의가 20.9%와 비교해 볼 때 엄청나게 민주적이지만, 한글 창제 과정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정책은 반드시 실행하였다(박현모, 세종 리더쉽).

'군신공치(君臣共治)', '군주와 신하가 함께 다스린다.'

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군주였지만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항상 잊지 않고 신하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언로를 활짝 열어놓음으로써 스스로 독단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다. 결국 그는 역사상 가장 민주적이면서도 선량한 독재자였던 것이다.

5. 전문가의 시대

"관직이란 내가 마음에 드는 사람을 데려다 앉히는 것이 아니다. 그 임무를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을 임명하는 것이다."

"무엇에든 넓게 경험하고 깊이 파고들어 스스로를 귀한 존재로 만들라."

세종대의 찬란한 문화와 유교정치의 발전을 이루게 한 원동력은 그의 시대에 배출된 수많은 쟁쟁한 인재들이다. 그의 시대에는 각 분야에서 독보적인 실력과 역량을 발휘한 천재들이 수없이 많이 나왔는데 그림의 안견, 음악의 박연, 과학기술의 장영실 등이 대표적이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등 산수화뿐 아니라 초상화·사군자 등에도 능했으며, 그의 화풍은 일본에까지 전해져 무로마치 막부 시기의 수묵화 발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조선 초기 최고의 화가 안견.

궁중 음악인 아악을 정리하고, 편경과 편종을 새롭게 만들고, 종묘제례악을 완성하여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한국 3대 악성으로 추앙받는 박연.

동래의 관노출신으로, 국비장학생으로 중국 유학까지 하여 혼천의와 자격루를 만들어 조선의 시간을 발견한 조선 최초이자 최후의 순수 공돌이 장영실.

이처럼 한 시대에 모든 분야에서 천재들이 발굴되어 역량을 펼쳤다는 것은, 그만큼 천재를 알아보는 그의 식견과 안목이 탁월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천리마가 있어도 이를 알아보는 백락(伯樂)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라는 뜻이다.

"나의 치세는 길어야 30년이나 너의 기술은 100년 아니 500년 아니 어쩌면 더 길게 살아남아 이 나라를 지탱할 힘이 되어줄 것이다. 하면 과인은 소중한 인재를 잃는 것이오, 후일의 후손들은 뛰어난 문명을 잃는 것이다. 후손들에게 그리 큰 빚을 질 수 없다."

장영실이 신분의 차별을 받아 물러나려고 할 때 그가 한 말이다. 결국 신분이 천하든지, 인간관계가 형편 없든지, 약간의 부정축재를 했든지에 관계없이 열심히만 하고 능력만 있으면 인정받는 시대, 바로 그의 시대가 조선과 우리나라 최대의 전성기로 남을 수 있는 배경인 것이다.

6. 세제 개혁

'취민유제(取民有制)', '백성에게 거둬들이는 것에는 일정한 제도가 있다.'

​그가 재위 9년째인 1427년 과거시험 시제로 낸 것이다. 그의 위대함은 공평하고 정확한 과세를 위한 조세 개혁에서도 엿볼 수 있다.

"호조에서 서울과 지방의 공법 시행에 관한 찬성과 반대 의견에 대해 아뢰기를 찬성하는 사람은 9만8657명이며 반대가 7만4149명입니다."

그가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등급을 6단계로 나누는 '전분 6등법(田分六等法)'과 농사의 풍·흉작에 따른 손실을 면세해주는 '연분 9등법(年分九等法)'을 시행할 때 행한 민심 수렴 결과다.

1432년 발간된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조선의 성인 남자는 69만2477명, 결국 성인 남자의 24.9%가 조세 개혁에 대한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군주 시대에 사실상 전 국민을 대상으로 20여 년 이상 국민의 뜻을 직접 물어 세제 개혁에 나선 세종, 그의 조세 개혁은 세계적으로 최장기 논의와 토론을 거친 입법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개혁에 대한 집념과 소신, 인내와 끈기,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야말로 동서고금의 어떤 지도자와도 비교하기 어려운 그만의 위대함이며 오늘날에도 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반드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자료사진). ⓒ데일리안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자료사진). ⓒ데일리안

7. 튼튼한 국방

"싸움에 이기고 지는 것은 대장 한 사람이 용맹한가 비겁한가에 달린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 지도자는 안보와 민생을 지키는 것이 필수 덕목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제일 잘 지킨 임금이 바로 세종이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이종무를 보내 대마도를 정벌, 서해안과 남해안에 출몰해 불법약탈을 일삼는 왜구를 소탕했다.

"너희가 살고 있는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에 예속되었으니 본래 우리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음을 분명히 상고할 수 있다. 다만 대마도는 땅이 매우 협소하고 또 바다 가운데에 있어서 왕래가 불편하여 백성들이 살지 않았더니, 왜노(倭奴)들 가운데 제 나라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는 자들이 모두 이리로 몰려들어 굴혈을 만들고 살며, 어떤 때에는 도적질을 하는 가운데 우리 백성들을 겁략하여 전곡을 약탈하고 마구 살해하며 집에 불을 놓는 등 흉악무도한 짓을 자행해 왔던 것이다."

이종무가 원정 뒤 대마도 수호에게 보낸 항복을 권하는 글이 참으로 와닿는다.

"우리나라의 우환은 주로 북방에 있다. 조종(祖宗)의 옛 땅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없다."

또한 그는 최윤덕을 보내 압록강 유역에 4군을, 김종서를 보내 두만강 유역에 6진을 개척했다. 아울러 이 지역에 백성들이 없으므로 남방의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실시하고, 그 지방의 사람을 그 지방의 관리로 임명하는 토관 제도를 실시했다.

조선 초기 최고의 무장으로 '출장입상(出將入相)'의 전형인 최윤덕과 김종서, 이들의 위업도 결국 현장경험과 전문성을 존중하는 세종의 포용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8. 나라를 나라답게 만든 군주

"내가 꿈꾸는 태평성대란 백성이 하려고 하는 일을 원만하게 하는 세상이다."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판단력, 의지를 관철하는 신념과 의지, 노비에까지 미치는 인정 등으로 빛나는 민족문화를 건설한 위대한 성군 세종, 백성들의 평범한 행복을 위해 비범한 노력을 했던 위대한 성군 세종.

"백성이 곧 나라요, 나라가 또한 백성이다."

"민생들이 하려고 하는 일을 혼란스럽지 않게 하려고 임금을 세워서 다스리게 했다."

그를 바라볼 때마다 과연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왕을 왕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오늘의 현실과 오버랩되어 떠오른다.

통합과 화해의 덧셈정치로 부국부민(富國富民)을 추구하기보다는 배제와 차별의 뺄셈정치로 증오와 갈등만 양산하는 구태 정치, 치열한 토론과 공개적인 의사결정, 민심에 의한 결정보다는 독선과 불통에 의한 일방 정치.

이것을 과연 나라다운 나라의 정치, 지도자의 모습으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나라를 다스리는 법은 믿음을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무신불립(無信不立)', 신뢰가 없이는 결코 일어설 수 없는 것, 오늘날 정치지도자들은 과연 얼마나 국민의 신뢰를 받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국민 위에 군림하는 정치가 아니라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고, 두려워하며, 진정 국민의 신뢰를 받는 새로운 정치는 과연 언제나 올 것인지 참으로 가슴이 답답하다.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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