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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비밀접촉은 우매하고 위험한 게임이다

이진곤 언론인 | 2018-02-19 04:58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의 방북을 공식 요청함에 따라, 대북 특사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자료사진) ⓒ데일리안/연합뉴스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의 방북을 공식 요청함에 따라, 대북 특사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자료사진) ⓒ데일리안/연합뉴스

○…남북 양 당국이 불과 한 달여 만에 ‘한반도기 공동입장’, ‘아이스하키 단일팀’, ‘삼지연관현악단 공연’ 등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는 건 기적(수십 년간 경험해 온 북한 정권의 행태로 보자면)에 가까운 일이다. 게다가 명목상이긴 하나 북한의 국가원수인 김영남과 김정은의 동생 김여정이 대표로 파견되기까지 했다.

이런 문제들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별로 이견이 없었던 점이나, 그런 행사가 이렇다 할 차질 없이 잘 진행됐다는 것 또한 신기하기까지 한 일이다. 문재인 정부가 특별한 재주를 가졌고 김정은 집단이 개과천선했다는 전제가 성립될 때나 이런 일은 가능하다.

북한의 위기모면 한국이 돕나

그런데 김정은이 갑자기 선해졌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추측을 해 볼 수 있겠다. 대한민국의 이른바 ‘촛불혁명 정부’가 남북관계(물론 정권끼리의 관계이지만)를 신속하게 개선하는 기회로 평창올림픽을 이용하려 했고, 김정은 체제가 급박한 상황에 내몰려 한국 정부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되었을 경우다. 양측 공히 손을 잡을, 말하자면 합작을 해야 할 이유와 계기가 충분했다고 하겠다.

①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이 군사력을 동원해 화근을 제거하겠다고 결심을 굳혔고, 이것을 북한이 감지 혹은 확인했다고 할 땐 급하게 돌파구를 찾지 않을 수 없다.

②미국은 북한의 핵무기와 ICBM이 당장의 위협이 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핵 및 미사일 무장을 서두르는 만큼 미국의 군사적 대응시기도 빨라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③그렇다고 핵무기와 ICBM을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인 만큼 어떻게 하든 시간을 벌어야 할 입장이다. 그러자면 미국의 군사적 대응 명분을 빼앗는 게 급선무다. 국제사회에 ‘김정은의 평화 염원’을 효과적으로 선전하는 방법으로는, 올림픽이란 세계인의 축제 마당에서 한국 정부와 화해의 어깨동무를 해 보이는 것을 능가할 게 없다.

김정은에게 한국 정부의 효용은 무엇일까?

①세계를 향해 평화공연의 무대를 만들고 분위기를 띄워주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적격의 파트너다. 상시적으로 무력도발의 위협을 받고 있는 한국 정부가 김정은의 평화 의지를 대변해 주는 데 누가 뭐라고 딴죽을 걸겠는가.

②북한이 미국에 대해 항구적으로 군비경쟁을 벌이려 할 까닭이 없다. 김정은의 목적은 전체 한반도 지배, 김일성의 표현으로 ‘국토완정’이다. 미국 및 일본의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을 문서로 확약한다면 ‘한반도 문제의 자주적 해결’이 가능하리라고 기대할지도 모른다. 이를 위한 미·북협상의 거간 혹은 물꼬 틔우기 역할을 한국 정부에 기대할 수가 있다.

③자신들이 핵무기를 갖게 된데다, 한반도의 남쪽에 진보좌파 정권이 등장한 지금이야 말로 남북 연방제 통일의 최적기다. 한미동맹만 해체시킬 수 있다면 그 이후는 탄탄대로가 된다. 물론 무력통일을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체제적 특성의 근접성을 높인 다음 연방제 통일을 한다면 남한에 대한 사실상의 지배가 가능해진다고 계산할 법하다.

청와대는 그런 일 없다 하지만

○…일본의 아사히신문이 18일 내보낸 ‘남·북간 비밀접촉’ 기사를 대단히 관심 깊게 여기게 되는 인식적 배경이 그것이다(상상력이 만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니겠는가). 지난해 11월 한국 정부의 당국자가 중국을 경유해 북한으로 들어가 올림픽 참가 문제를 협의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그리고 그 접촉은 한국 정부가 먼저 요구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는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 오보다”라고 한 모양이다. 다른 관계자들은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걸 확인할 수 있겠나”라거나 “아는 바 없다” “확인할 수 없다”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고 국내 언론들이 보도했다.

청와대 관계자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비밀 접촉’은 전에도 있어왔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도 남북이 비밀리에 만나 협상을 벌인 끝에 성사됐다. 김 전 대통령 정부는 이른바 ‘회담 대가’로 4억5000만 달러의 현금을 비밀리에 송금하기까지 했다. 이명박 정부 때도 정상회담 협상을 위한 비밀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금방 밝혀졌었다.

외교관계에서 ‘비밀협상’은 불가피한 프로세스로 인정된다. 국가 간의 협상 과정이 그때그때 일일이 공개되면 논의가 진척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정상회담을 위한 남북 간의 비밀접촉이나 협상은 배제돼야 한다.

①남북 집권자의 입장이 전혀 다르다. 북한 김정은은 종신 통치자인 반면 우리 측 대통령은 한시직이다. 임기가 한정된 쪽은 시간에 쫓긴다. 임기 안에 가시적 실적을 내야 하는 처지라면 국가이익보다는 회담성사에 더 무게를 둘 개연성이 높다.

②북한은 철저한 폐쇄·통제 체제다. 주민들은 당국이 알려주는 이외의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은 물론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에 비해 우리 사회는 개방돼 있다. ‘비밀스런 일’에 대한 부담을 어느 쪽이 더 느낄 것인지는 불문가지다. 일단 접촉이 시작된 다음엔 상대방 압력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권이 돈 봉투를 내밀며 정상회담을 애걸하더라고, 비밀접촉 20여일 만에 폭로한 게 그 예다. 비밀리에 만난 후엔 ‘폭로’의 전권을 북한이 장악하는 불공정 게임임을 잊어선 안 된다.

③비밀협상 끝에 성사되는 정상회담은 우리 측의 일방적 부담을 초래하기 십상이다. 두 번의 경험만으로도 그 설명은 충분하다. 게다가 이는 위험한 게임이다. 선전선동에서는 저들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17일 남북정상회담 가능성과 관련,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이라고 말한 것으로 언론들이 전했다. 그는 이날 오후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 리조트 내의 메인프레스센터를 방문, 세계 언론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일에는 순서가 있고, 성사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겠다.

우물에서 숭늉 찾는 이 누굴까

그러니까 정상회담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간절히 바라긴 하지만 언론들이 너무 앞질러 추측 혹은 예상보도를 함으로써 분위기를 비틀어 놓을까봐 걱정된다는 말로 들린다. 실제 그의 입장이 그렇다. 북한 측은 이미 김여정을 통해 평양 방문 초청장을 보내왔다. 그건 곧 정상회담을 희망한다는 의미다. 다만 문 대통령이 말했듯이 ‘여건’을 만드는 게 선결과제다. 국민의 동의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높은 여론 지지율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트럼프를 설득시킬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현재로서는 오히려 비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만약 문 대통령이 김정은과 만나 북한 핵문제를 해결해 내거나 최소한 단초라도 마련한다면 그는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된다. 당연히 진보좌파 장기집권의 길도 훤하게 열린다. 그리고 김대중·김정일 두 사람이 6·15남북공동선언에서 합의한 대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을 토대로 한 통일도 기대할 수 있다(이야말로 진보좌파정권이 민족사적 과업으로 인식하고 있을 터이다). 개인적으로는 ‘노벨평화상’이 ‘떼어 놓은 당상’이 될 것도 같다.

어쩌면 청와대와 정부의 외교안보통일 라인은 정상회담을 위한 여건 조성과 준비 작업을 시작했을 지도 모른다. 비밀접촉설을 믿지는 않지만 딱히 못 믿겠다고 할 증거도 없다. 청와대의 발표나 관계자의 언급이 크게 신뢰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몇 차례 확인된 바가 있다.

남북 양측이 비밀리에 만나 이야기했다면 정상회담을 비켜갔을 리 없다. 공감대가 형성된 가운데 김정은의 평양 초청장이 전해졌다는 게 자연스런 추측 아닐까? 사전에 충분히 상호 이해가 이뤄졌다면 올림픽 참가와 방식에 대해 이렇다 할 다툼이 없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명목상이긴 하지만 국가원수인 김영남과 김정은의 동생 김여정 등 파격적 대표단을 구성해서 보낸 배경도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문 대통령이 그리는 구도대로 일이 되어갈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 미국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 같은 문제해결 방안을 수용하려 하겠는가. 이런 장기판 만들기에 너무 골몰하면 오히려 미국으로 하여금 독자행동에 나설 핑계만 만들어줄 수가 있다. 이른바 ‘코리아 패싱’이다. 모르긴 하지만 정보 수집, 상황 판단, 정세 분석, 미래 예측 능력에서 우리가 미국을 앞지른다는 생각은 꿈에서라도 하게 되지 않는다.

신뢰성이 의심되는 새 친구를 얻기 위해 오래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옛 친구를 버리는 것만큼 어리석고 무모한 일은 없다. 지극히 당연한 이 상식을 한사코 외면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보여서 걱정이다.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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