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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하게 살아내고, 진짜 행복을 외치다

이석원 스웨덴 객원기자
입력 2018.01.27 05:00 수정 2018.04.06 08:39

<한국인, 스웨덴에 살다 19> 영원한 ‘에릭손맨’ 조규용 씨

스웨덴 미국 스위스 누비며 전기통신의 심장을 움켜쥔 삶

외교부의 2017년 자료에 따르면, 현재 스웨덴 거주 재외 국민은 3174명. EU에서 여섯 번째로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웨덴에 사는 한국인들의 삶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지 않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국가의 모든 것이 가장 투명한 나라로 통하는 스웨덴 속의 한국인의 삶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스웨덴 속 한국인은, 스웨덴 시민권자를 비롯해, 현지 취업인, 자영업자, 주재원, 파견 공무원, 유학생, 그리고 워킹 홀리데이까지 망라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스웨덴 사회는 한국과는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통해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지점도 찾아본다. [편집자 주]

한국에서 결혼해 스웨덴과 미국과 스위스를 거쳐 다시 스웨덴에서 또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조규용-김혜영 부부. (사진 = 조규용 제공) 한국에서 결혼해 스웨덴과 미국과 스위스를 거쳐 다시 스웨덴에서 또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조규용-김혜영 부부. (사진 = 조규용 제공)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통신회사. 한 때 세계 이동통신계를 주도했던 선두 기업. 비록 휴대전화 시장에서는 그 이름을 감추고 말았지만, 그래도 세계 최대 이동통신 장비 제조사. 이 정도 너스레면 눈치 빠른 사람들은 에릭손(Ericsson)이라는 기업을 떠올릴 것이다.

1876년 설립된 이래 스웨덴 기업의 자존심인, 스웨덴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엘리트들의 집단인, 스웨덴 사람들이 ‘20세기 바이킹의 자긍심’이라고 부르는 그곳이 일생의 터전이었던 한국 사람이 있다.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동안 스스로를 ‘에릭손맨’이라고 칭하며 열정을 바쳤던 조규용(64. 에드먼드 조) 씨가 그 주인공이다.

이미 몇 해 전 에릭손을 떠난 몸이지만, 지금도 조규용 씨는 에릭손 이야기만 하면 눈이 초롱초롱해진다. 내년이면 스웨덴 사람들의 소망인 ‘정년퇴직 연금수령자(Pensionär)’가 되는 조규용 씨에게 에릭손은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규용 씨와 에릭손의 인연은 거의 3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규용 씨는 부인 김혜영(안젤라 조. 스웨덴에서 남편 성을 따랐음) 씨와 결혼을 하자마자 스웨덴에 온다. 1980년 스웨덴 남부 도시 보로스(Borås)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간호사로 취업한 부인의 현신적인 내조를 받아 그는 예테보리에 있는 샬머스(Chalmers) 공과대학에서 마이크로컴퓨터테크닉 프로그래밍을 공부한다. 당시 한국에서는 쉽게 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니었다. 그렇게 조규용 씨는 신혼과 유학이 동시에 시작된 셈이다.

대학 공부를 마치자마자 조규용 씨는 이른바 ‘꿈의 직장’으로 불리는 에릭손에 입사한다. 그것은 그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구체적인 희망이 실현되는 계기였다.

“스웨덴 기업 문화가 한국과는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비슷한 것이 있다면 인간관계에요. 스웨덴 기업에서도 같은 학교, 같은 고향, 같은 취미 등으로 인간관계가 형성되죠. 물론 그것 때문에 특혜가 주어지지는 않지만. 에릭손에 입사하니까 직속 상사가 자기도 샬머스 출신이라며 반가워 해줬죠. 회사 생활의 좋은 출발이었습니다. 하지만 눈에 뛸 수밖에 없는 외국인의 신분이라 늘 조심했어요. 나의 실수는 곧 나라 망신일 수 있다는 긴장감을 놓지 않았죠. 그랬더니 다행히 능력이라는 선물로 돌아오더군요.”

에릭손에서 ‘꽤 능력 있는 한국인 직원’으로 인정을 받고 있을 무렵, 그에게는 에릭손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시스템 엔지니어 업무가 주어졌다. ‘나라 망신 안 시키고’ 열심히 실력을 쌓은 결과물이었다. 영국과 아일랜드 등으로 수차례 해외 출장의 기회가 주어지더니 마침내 미국 근무라는 행운까지 찾아왔다.

조규용-김혜영 부부의 금쪽같은 자식들. 왼쪽은 미국 석유회사 취리히 지점장으로 근무하는 딸 유진 씨 부부, 오른쪽은 취리히 텔레콤 회사에 엔지니어로 근무하는 아들 병현 씨 부부. (사진 = 조규용 제공) 조규용-김혜영 부부의 금쪽같은 자식들. 왼쪽은 미국 석유회사 취리히 지점장으로 근무하는 딸 유진 씨 부부, 오른쪽은 취리히 텔레콤 회사에 엔지니어로 근무하는 아들 병현 씨 부부. (사진 = 조규용 제공)

하지만 미국으로 가는 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촉발된 걸프 전쟁은 미국의 뒤흔들었다. 게다가 미국 내에서 요동치는 반아랍 정서는 아랍인들 뿐 아니라 백인이 아닌 이민자들에 대한 비우호적인 분위기로 확산되기도 했다. 자연히 조규용 씨의 미국 비자 발급도 늦어졌고, 미국 근무 무산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에릭손 아닌가?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조규용 씨는 결국 미국 덴버에 안착해 미국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조규용 씨가 미국에서 진행한 업무는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미국 통신회사 웨스턴벨 소속 전화국들의 아날로그 전화 시스템을 디지털 시스템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그 지역의 전화 개통까지 책임졌다. 거의 매번 수십 억 달러짜리 사인을 받아오는 것도 그의 임무였다. 그 중 옐로우 스톤(Yellow stone) 국립공원을 비롯한 주위 몬타나와 와이오밍주의 전화 시스템은 조규용 씨의 손을 거친 것 그대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미국 근무 3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다시 가족 모두 스웨덴으로 돌아왔다. 스웨덴에서도 그가 맡은 일은 중요했다. 에릭손이 진출한 156개국에 매주 업그레이드에 필요한 시스템을 전달하는 일이었다. 그 바람에 책임자인 조규용 씨의 이름이 시스템과 함께 세계로 전파됐다. 에릭손의 시스템에 기댄 각국의 통신 담당자들에게 ‘에드먼드 조’는 유명인사가 돼 버린 것이다.

조규용 씨는 신혼 때부터 간호사로 근무하는 부인 김혜영 씨가 없었다면 스웨덴 정착은 어림없었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사진 =조규용 제공) 조규용 씨는 신혼 때부터 간호사로 근무하는 부인 김혜영 씨가 없었다면 스웨덴 정착은 어림없었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사진 =조규용 제공)
그러나 역마살일까? 스웨덴에서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조규용 씨는 슬슬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다시 스웨덴을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이 하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미국과 호주 지사에 자리를 타진했다. 그런데 오퍼는 영 다른 곳에서 왔다. 스위스였다.

스위스는 조건이 좋았다. 일단 급여도 훨씬 높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가진 스위스에서의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하지만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일을 하고 있는 부인이 있었고, 또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위스에서의 인터뷰를 마친 후 베른 중앙역을 지나고 있었다. 길에서 이탈리아 사람들이 화로에 구운 군밤을 팔고 있었다. 가뜩이나 한국 생각이 절실해 향수를 가슴에 묻고 사는 마당인데, 베른 중앙역의 그 군밤은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를 끄집어 내주었다. 그는 군밤 한 봉지를 품에 안고 스웨덴에 돌아왔다. 그리고 부인 김혜영 씨에게 그것을 보여주며 스위스에서 살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시작한 스위스 생활은 그에게 또 다른 삶의 도전이었다. 그런데 힘겨움은 다른 곳에서 생겼다. 아이들이었다.

“스위스는 전혀 다른 교육 환경이었습니다. 독일어와 불어를 해야 했고, 고교 진학을 위해 우수한 성적을 요구했죠. 중학교 한 반에서 10명 정도만 추천됐고, 나머지는 시험을 통과해야 했어요. 아이들은 힘들어했고, 자칫 좌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가정교사를 고용했고 아이들은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고교에 진학할 수 있었죠. 아이들에게는 큰 고비였는데 잘 넘겼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아이들의 학교 바로 옆에서 북한의 김정은이 고등학교를 다녔더군요.”

스위스에 정착하는데 힘겨운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스위스 사람들이 조규용 씨를 보는 눈길이 곱지만은 않았다. 스웨덴 사람, 그것도 한국 이민자인 스웨덴 사람. 그들의 시선은 복잡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한 할머니는 조규용 씨의 직업을 물어보고는 “너희들 때문에 우리 아들 취직자리가 없다”며 한탄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규용 씨도, 부인과 아이들 모두 스위스에 완벽히 적응했다. 그것은 스웨덴 삶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스위스에서 13년의 삶을 정리하고 조규용 씨는 부인과 함께 스웨덴으로 돌아왔다. 자녀들은 이미 결혼해 스위스에서 가정을 꾸리고 터전을 잡았기에 그곳에 남았다. 조규용 씨와 김혜영 씨는 그렇게 또 한 편을 떼어 놓은 것이다.

스웨덴과 미국과 스위스, 그가 한국을 떠나온 지 38년이 돼 간다. 한국에서 산 세월보다 한국이 아닌 곳에서 산 세월이 거의 2배에 이르고 있다. 정착을 위해, 안정을 위해, 그리고 가족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오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늘 그의 곁에서 떠나지 않는 기억은 스웨덴 정착 초기에 있었던 일이다.

스웨덴 이민 초기 딸 유진 씨(사진 중앙 족두리 한복 입은 아기)의 돌 사진. 함께 있는 아이들은 한국인 입양아들이다. 조규용 씨는 스웨덴 이주 초기부터 한국인 입양아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해왔다. (사진 = 조규용 제공) 스웨덴 이민 초기 딸 유진 씨(사진 중앙 족두리 한복 입은 아기)의 돌 사진. 함께 있는 아이들은 한국인 입양아들이다. 조규용 씨는 스웨덴 이주 초기부터 한국인 입양아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해왔다. (사진 = 조규용 제공)

1980년 처음 스웨덴 남부 보로스에 자리 잡았을 때 일이다. 동네 마트에서 장을 보는데, 아주 조그만 여자 아이 하나가 조규용 씨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낯설지 않은 느낌의 동양 아이. 그러더니 한 스웨덴 부부가 와서 묻는다. 한국인이냐고. 알고 봤더니 3살짜리 그 여자 아이는 한국에서 입양된 아이 멀린이었고, 안데르스와 안마리는 그 아이의 양부모였다.

안데르스와 안마리 부부는 멀린 외에도 이미 2명의 한국 입양아들을 더 키우고 있었다. 한국에서 외면한 아이들을 셋이나 키우고 있는 그들에게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다. 그들의 삶이 훨씬 숭고해 보이기까지 했다. 안데르스와 안마리 부부의 권유로 그들의 집 근처로 이사를 했고, 그들과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그리고 그때부터 한국 입양아들에게 한국의 동요와 문화를 보급하는 일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조규용 씨는 치열하게 살아온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본다. 자신이 한국을 떠나오던 때 꿈꾸던 것들이 지금 얼마나 실현됐을까? 자신은 한국인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을까? 그렇게 그들의 가족은 행복했을까?

이런 상념 속에서 조규용 씨가 아직도 가슴에 묻고 힘겨워 하는 일이 있다.

처음 스웨덴에 오고 3개월 지났을 때 한국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런데 가족들은 조규용 씨가 스웨덴 정착 초기라 힘들테니 알리지 말라고 했다. 나중에야 그 소식을 들은 조규용 씨는 가슴으로 한없이 울었다. 그리고 지난 해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셨다. 마침 크리스마스를 맞아 스위스에서 자녀들과 함께 있을 때였다. 이번에는 어머니의 가시는 모습을 뵐 수 있었다. 38년 세월의 간극이었을까?

“열심히 살았죠. 스웨덴이든 미국이든 스위스든 우린 한국인이잖아요. 힘껏 살다보니 잘 살아졌고, 또 행복했습니다. 우린 소중한 가족들이니까요. 어디에서 사는 지보다는 어떻게 사는 지가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과 아들 모두가 함께 열심히 산겁니다. 그게 행복이죠.”

스웨덴 속의 한국인 조규용 씨는, 스웨덴 속 행복한 한국인이다.

[필자 이석원]

25년 간 한국에서 정치부 사회부 문화부 등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지난 2월 스웨덴으로 건너갔다. 그 전까지 데일리안 스팟뉴스 팀장으로 일하며 ‘이석원의 유럽에 미치다’라는 유럽 여행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현재는 스웨덴 스톡홀름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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