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페이스북
X
카카오톡
주소복사

100년전 식민지 벽촌에서 태어난 박정희를 회고하다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17.11.13 05:57 수정 2017.11.13 06:02

<칼럼>한국인의 잠재된 역량 발양시킨 박정희 리더십

적폐청산이라는 복수혈전으로 기념은 커녕 스산한 '그날'

육영수 여사와 박정희 대통령ⓒ 박대통령기념관 육영수 여사와 박정희 대통령ⓒ 박대통령기념관

“민주주의 정치제도 운용의 역사가 얕다거나, 시행착오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막중한 부담과 희생을 지불한 우리들이기에, 여기에 또 다시 강력정치를 빙자한 독재의 등장도, 민주주의를 도용한 무능, 부패의 재현도 단연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연설은 이렇게 이어진다.

“여하한 이유로서도 성서를 읽는다는 명목아래 촛불을 훔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새 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나는 국민 앞에 군림하여, 지배하려 함이 아니오, 겨레의 충복으로 봉사하려는 것입니다.”

제5대 대통령 취임사의 일부다. 군정 2년 7개월여를 거쳐 박정희는 1963년 12월 17일 민선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취임사는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과 실천의지로 채워졌다.

스산한 탄생 100주년 언저리

그가 취임사에서 이처럼 민주주의를 강조했던 것은 아마도 4‧19로 성립된 제2공화국을 무너뜨린 부담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5‧16은 4‧19를 계승하고 그 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그러니까 민주정치의 실천과 정착을 위한 거사였다”고 말하려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지만 그의 의식 속에 있던 민주주의는 ‘수입민주주의’가 아니었다. 그는 62년에 펴낸 『우리민족의 나갈 길』에서 이 같은 인식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서구적인 민주주의가 아닌, 즉 우리의 사회적·정치적 현실에 알맞은 민주주의를 해 나가야만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듬해 대선 직전에 출간한 『국가와 혁명과 나』 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아직 민주주의는 일부 한정된 지식층의 전매특허적 완상물이거나, 직업 정상배의 생활 밑천처럼 되어, 왜곡된 위장 민주주의에 시달린 국민으로 하여금, 의식적인 혐오가 아니면 고통, 번민, 불평의 배출구처럼 오용되고 있다.”

그는 서구에서처럼 개인의 자유가 극도로 강조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국가주의가 가미된 ‘한국적 민주주의’ ‘민족적 민주주의’를 구상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것이 결국엔 ‘유신헌법’이라는 극단적 표현에 이르고 말기는 했지만….

(훗날 재독 학자 송두율의 북한체제에 대한 ‘내재적 접근론’이 진보학자․좌파운동가들에 의해 옹호된 것은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 ‘민족적 민주주의’를 심하게 비판했던 그들이 송 교수의 논리를 통해 북한 체제를 비호하거나 변호하려 했던 것은 자기모순이 아닐까?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일수록 ‘민족’ 또는 ‘민족 자주성’ ‘민족 주체성’의 깃발을 높이 들고 있는 것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익히 알려진 것처럼 박 전 대통령이 5·16 쿠데타를 통해 정작 추구하려 했던 것은 ‘민주정치’가 아니라 ‘산업혁명’이었다. 취임사에서 보인 관심과는 달리 이른바 ‘혁명공약’의 6개항 가운데 어디에도 ‘민주정치’는 없었다.

“우리의 지상 목표는 두말할 것 없이 4·19혁명을 계승하고, 경제·정치·사회, 일반문화의 향상과 신민족세력을 배양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5·16군사혁명의 핵심은, 민족의 산업혁명화에 있었다는 것을 재강조하고 싶다는 것이다”(박정희, 위의 책).

그의 염원은 이뤄졌다. 농경사회를 공업화 사회, 나아가 산업화 사회로 변모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비약적 경제성장이 가능해졌다. 그는 ‘대망의 80년대’ 청사진을 내걸고 국민의 정치적 불만을 무마시키며 국민적 에너지를 경제발전에 투입하려 했다.

조국 산업혁명엔 성공했지만

“1991년 겨울, 전화벨소리에 잠이 깬 주부는 온수 꼭지에서 나오는 더운물로 세수를 한 뒤 전기밥솥에 스위치를 넣고 가스레인지에 생선을 구워 아침을 마련한다. 냉장고의 주스로 식후 입가심을 한 부부는 자가용을 운전, 가까운 슈퍼마킷서 장을 보고 트랙터구입을 위해 도시로 나간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컬러 텔리비전을 본다. 이 素描(소묘)가 바로 유정회 정책연구실이 지난 1년 간 연구 끝에 책자로 펴낸 ‘내일의 한국-대망의 80년대’에서 91년의 한국 中農(중농) 가정을 그린 모습이다. 이 미래상은 21일 정부·여당 연석회의에서 尹胄榮(윤주영) 정책연구실장에 의해 보고됐다.”(경향신문, 1977. 12. 22)

‘수출 10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도 70년대의 정부가 80년대에 거는 희망이고 약속이었다.

당시로서는 꿈같기만 했던 그 미래상이 구현된 지도 이미 오래다. 박 전 대통령은 80년대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쓰러졌지만 그의 꿈은 이뤄졌다.

“전 세계가 알다시피 그(6‧25) 이후 두 세대에 걸쳐 기적과 같은 일이 한반도 남쪽에서 일어났습니다. (중략) 한 생애가 채 되기도 전에 한국은 끔찍한 참화를 딛고 일어나 지구상 가장 부강한 국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8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감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도 지금도 이른바 민주화세력은 그의 성공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의 경제발전은 너무 짙은 그늘을 동반했으므로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것이고, 민주정치를 압살하려 했기 때문에 용납될 수 없다고 한다. 어쩌다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하는 경우도, 아주 인색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언급이 그 예다.

그는 2007년 1월 3일 정부과천청사에서 가진 경제 관료들과의 오찬에서 박 전 대통령과 관련, “많은 사람들은 박정희시대가 성장의 기틀을 잡은 것이라고 얘기하고 저도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그런데 긴급조치하고 사람 잡아 놓고 죽이고 그렇게 해서 그렇게 된 것일까 질문을 해 보지만 아마 어떤 경우라도 (경제발전이) 왔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리더의 역할이 필요 없다는 뜻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자신은 왜 대통령이 되려고 했을까? 박정희가 아니었어도 경제발전이 가능했다면 북한의 김일성도 같은 성과를 낼 수 있었어야 했다. 세계의 모든 저개발 국가들이 우리만큼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또 무엇인가.

물론 대한민국의 국민이었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던 성과다. 그러나 박정희가 배제된 상태였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국인에겐 남다른 역량이 내재돼 있었다. 그걸 발양(發揚) 시킨 것이 박정희 리더십이었다. 아무리 좋은 석재라도 위대한 조각가를 만나지 못하면 그냥 돌덩이로 남을 뿐이다. 솜씨 없고 성격 나쁜 석수라도 만나면 자갈로 바스러져 흩어지기 십상이고.
1917년 11월 14일 경북 선산군 구미면의 산간마을 상모리에서 박성빈·백남의 부부의 5남 2녀 가운데 막내로 박정희는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로서는 회임을 반길 수만은 없었다.

그였기에 경제발전 가능했다

“어머니께서는 만산에, 딸과 같은 해에 임신을 했다고 해서 매우 쑥스러워 하셨다고 하며 나를 낳으면 이불에 싸서 부엌에 갖다 버리려고 했다고 가끔 농담을 하셨다.”
박 전 대통령은 그렇게 회고했다(김종신, 박정희 대통령과 주변 사람들).

합법정부를 쿠데타로 전복시키고 집권을 한 것은, 당시의 절망적 정치상황을 감안하더라도 비판의 여지가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세계 현대사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사람으로서 박정희만큼 국가발전에 헌신적이었던 인물은 없다는 사실도 기억돼야 한다.

유자녀 3남매 가운데 맏딸이 국민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직에 올랐으나 리더십 부족과 진보좌파세력의 집요한 공격으로 탄핵을 당한데다, 영어의 몸으로 형사재판을 받아야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둘째딸은 생활이 어렵다는 소문이고 송사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아들은 성공한 사업가로서 슬하에 아들(그러니까 박 전 대통령의 손자) 넷을 두고 있다.

그의 집권기간 내내 한사코 반대하고 반발하던 사람들, 그의 사후에도 폄훼와 공격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 그의 딸을 마침내 대통령직에서 끌어내린 사람들이 지금 이 나라의 권력중심을, 그리고 그 엄호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적폐청산’의 기치를 내걸고 검찰을 앞세워 광범위한 징벌 작업을 기세등등하게 벌이는 중이다.

그런데 어쩐지 복수혈전(이경규가 감독한 영화의 제목)을 보는 기분을 떨칠 수 없다. 이들의 적폐청산은 박근혜 정부를 지나 이명박 정부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11일엔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과 임관빈 전 국방부 정책실장이 사이버 사령부 온라인 여론조작 활동 혐의로 구속됐다. 2012년 대선에 불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죄목이고 그에 따른 징벌이라고 여겨진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호령소리가 온 나라를 뒤흔드는 것 같은 분위기다. 마치 모든 ‘적폐’를 다 쓸어낼 것 같은 기세다. 그렇게 해서 청정국가가 되면 야 오죽 좋으랴. 그런데 검찰이 오늘은 문 대통령의 손에 쥐어진 검으로서 주인의 뜻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어제는 다른 대통령의 검이었고, 내일은 또 다른 대통령의 검이 된다는 사실을 명념할 필요가 있다. 임기는 5년이다. 지금도 각일각 시간은 간다.

이래저래 요즘 날씨처럼 스산한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를 기억하고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이날을 기념하겠지만 처연한 생각이 마음을 파고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이진곤의 그건 아니지요'를 네이버에서 지금 바로 구독해보세요!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관련기사

댓글 0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