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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돌보며 살아온 스웨덴 60년 “참 괜찮았다”

이석원 객원기자
입력 2017.10.28 04:55 수정 2017.11.09 17:37

<한국인, 스웨덴에 살다 8> 평생 어린이집 원장 천순옥 씨

한국의 전쟁고아들 돌보며 꾸었던 꿈, 그 아름다운 마무리

외교부의 2017년 자료에 따르면, 현재 스웨덴 거주 재외 국민은 3174명. EU에서 여섯 번째로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웨덴에 사는 한국인들의 삶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지 않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국가의 모든 것이 가장 투명한 나라로 통하는 스웨덴 속의 한국인의 삶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스웨덴 속 한국인은, 스웨덴 시민권자를 비롯해, 현지 취업인, 자영업자, 주재원, 파견 공무원, 유학생, 그리고 워킹 홀리데이까지 망라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스웨덴 사회는 한국과는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통해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지점도 찾아본다. [편집자 주] [편집자 주]

평생을 아이들을 돌보는 일로 살아온 스웨덴 재외동포 천순옥 씨. (사진 = 이석원) 평생을 아이들을 돌보는 일로 살아온 스웨덴 재외동포 천순옥 씨. (사진 = 이석원)
“전쟁이 끝난 후 부산에서 본 것은 참혹함 그 자체였죠. 특히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전쟁고아들의 모습은 채 어른이 되지 않은 내 눈에도 참담함 그 자체였어요. 부모가 있는 아이들이라고 해서 별반 다를 것도 없었지만. 나에게 전쟁은 포탄이 떨어지고 총에 맞아 죽는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도저히 눈 뜨고는 볼 수 없었던 처참하게 버려진 아이들의 눈망울들이었죠. 그리고 그 아이들의 더렵혀진 정신과 육신은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렸습니다.”

천순옥(80. 아니타 천. Anita Chun - 천순옥 씨는 원래 김순옥, 즉 아니타 김이었다. 결혼 후 스웨덴의 풍습대로 남편의 성을 따라서 천순옥이 된 것이다.) 씨가 스웨덴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한국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3년이다.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경남 김해 대동면 원지 마을은 전쟁의 포화가 미처 미치지 못한 곳이었다. 전쟁이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고 이 땅을 파괴했다는 것을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실감할 수는 없었다. 정작 그녀에게 전쟁은 전쟁이 끝난 1953년 시작되었다.

천순옥 씨는 5살 때 앓은 장티푸스의 후유증으로 얼굴의 모습이 평범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부모님은 부산에 있는 스웨덴 병원에 보내 수술을 받게 했다. 그게 1953년 그녀 나이 17살 때였다. 당시 부산은 피난민과 전쟁고아들로 또 다른 전쟁터였다. 수술을 받은 후 그녀는 스웨덴 의사와 간호사의 권유로 그 병원에서 일을 했다. 그러다가 1955년 경 스웨덴 병원이 거의 철수하고 의사 1명과 간호사 1명 만 남았을 때 천순옥 씨는 이들과 함께 고아원을 돌아다니고, 피난민들이 엉켜서 사는 동네를 다니며 예방 접종도 시키고 치료하는 것을 돕기도 했다. 그러니까 천순옥 씨의 스웨덴은, 실은 한국이었고, 전쟁이었고, 참혹한 지옥에서 시작된 것이다.

당시 부산에 있던 스웨덴 아동구호연맹의 영국인 의사 존 아담스 박사와 스웨덴인 간호사 마르가리타 린드불룸은 어느 날 천순옥 씨에게 스웨덴에 갈 것을 권한다. 그곳에서 마저 얼굴 수술도 받고 공부도 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모든 준비를 해놓았다.

1961년 천순옥 씨는 스웨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당시 스웨덴은 달보다도 더 먼 곳이었다. 부산에서 탄 비행기는 서울 김포공항을 거쳐 당시 버마의 랑군과 인도 캘커타, 그리고 파키스탄의 카라치를 거쳐 다시 영국 런던을 통해 스웨덴 스톡홀름 브롬마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무려 33시간의 비행이었다. 그 길고 지루한 시간 천순옥 씨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다시 정리했다.

천순옥 씨의 대학 동창들. 대학을 졸업한 후 30년 만인 1997년에 천순옥 씨의 집에서 만나 옛 추억을 더듬기도 했다. (사진 = 천순옥 제공) 천순옥 씨의 대학 동창들. 대학을 졸업한 후 30년 만인 1997년에 천순옥 씨의 집에서 만나 옛 추억을 더듬기도 했다. (사진 = 천순옥 제공)

“전쟁 직후 부산의 스웨덴 병원에서 일하면서 나중에 일을 해서 돈을 벌면 딱 30명의 고아들을 모아서 키우겠다고 생각했었죠. 한 고아원에 수백 명 씩 비참하게 수용돼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고아라도 좋은 환경에서 좋은 보살핌을 받으며 살 수 있는 세상, 그런 날을 그렸었는데, 아마 스웨덴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그 생각들로 머리를 채웠던 것 같아요. 물론 당시는 수술을 받고 회복하면 1년 정도 걸릴 것을 예상하고 가는 길이긴 했지만요.”

한국에 있을 때도 영국 아동구호연맹이나 스웨덴 아동구호연맹 등에서 그녀를 계속 찾았었다. 함께 일을 하자고. 스웨덴에 오니 이번에는 스웨덴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원래 수술 후 1년 정도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녀는 스웨덴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예 그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쌓기 위해 스웨덴 국립 보육대학에 진학했다. 그곳에서의 공부는 그녀 인생에 구체적인 길을 제시해줬다. 전쟁고아들을 보면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로 일생을 바치겠다던 생각이 좀 더 구체적으로 방향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한국을 영 잊을 수가 없었다. 이미 스웨덴 시민권도 취득한 상황이지만 1969년 그녀는 33시간을 날아왔던 그 길을 다시 되돌아 한국으로 돌아간다. 물론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해서 그녀가 스웨덴과의 인연을 끊은 것은 아니다. 부산으로 돌아간 그녀는 다시 스웨덴 아동구호연맹에서 일한다. 이번에는 책임자의 위치가 됐다. 그리고 교육자의 입장이 됐다. 스웨덴 아동구호연맹에서 운영하는 ‘에듀케이션 센트리’라는 교육기관에서 그녀는 아이들을 돌볼 보모들을 교육하고 양성했다. 불행한 아이들이 나오지 않기 위해서는 보모들에 대한 교육이 더 절실했다고 느낀 것이다. 당시 그 교육원을 통해 양성된 보모들은 이후 한국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게 된다. 즉 한국의 초기 어린이 교육의 틀이 이때 잡히기 시작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5년 정도 한국에서 아이들도 돌보고, 부모 교육도 시키며 살았는데, 그 사이 내 아이들의 아빠를 만나 결혼을 하고, 또 금쪽같은 딸과 아들을 낳았죠. 아마 그 때 남편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수도 있고, 스웨덴에 갔더라도 계속 스웨덴에서 살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다시 스웨덴에 간 것은 남편의 생각이었고, 스웨덴에 뿌리를 내린 것은 아이들의 바람이었거든요.”

1970년 부산에서 결혼한 천순옥 씨는 스웨덴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남편의 희망을 따라 1973년 한 여름에 스웨덴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이들이 점점 자라면서 그 아이들은 스웨덴에서 계속 살기를 원했다. 그때까지도 천순옥 씨는 한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생각이 강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스웨덴은 이미 그녀의 나라가 돼 있었다. 한국은 잊을 수 없는 그녀의 조국이지만 스웨덴 또한 그녀와 가족의 소중한 집이 돼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스웨덴에 뿌리를 내리기로 했다.

천순옥 씨는 스웨덴에 돌아와서 스톡홀름 시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의 원장이 됐다. 어린이집 원장이 된 후 그녀는 수많은 아이들을 돌봤고, 또 그 아이들을 돌보는 교사들을 관리했다. 아이들을 부모를 만나서는 그 아이들이 어떤 관리를 받으며 어떻게 자라야 하는지를 교육하기도 했다. 스톡홀름 시에서도 그녀가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헌신하며 평생을 살아온 것이다.

천순옥 씨가 원장으로 근무한 스톡홀름 시 한 어린이집의 동료들.(사진 = 천순옥 제공) 천순옥 씨가 원장으로 근무한 스톡홀름 시 한 어린이집의 동료들.(사진 = 천순옥 제공)

17년 전인 2000년에 천순옥 씨는 정년퇴직을 했다. 모든 스웨덴 직장인들이 꿈꾸는 연금수령자가 된 것이다. 그 때까지 그녀는 늘 아이들과 함께 했다. 비록 어렸을 때의 꿈이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선회했다. ‘딱 30명의 고아들’을 돌보며 살겠다고 생각했었지만 그 보다 수백 배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해왔다. 그리고 그렇게 산 그녀는 아무런 후회도, 아쉬움도 없다. 늘 그녀를 지켜준 두 가지, 깊은 신앙심과 아이들에 대한 헌신이 그녀를 옹골차게 부여잡아 줬기 때문이다.

“사실 비참해진 한국을 떠나 스웨덴에 왔고, 그래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면 더 벅찬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1960년대에는 스웨덴의 모든 것들을 한국으로 옮겨다 놓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한국이 스웨덴보다 더 많은 풍족함을 누리기도 하니까요. 나는 지금도 한국 사람인 것이 자랑스럽고, 그러면서도 스웨덴의 삶에도 만족해요.”

그녀는 지나간 수십 년의 이야기를 곱씹어 다시 끄집어내는 일이 마뜩찮았다. 나이 먹은 노인네의 넋두리 같아 싫었고, 별 대수롭지 않게 살아온 세월을 스스로 포장하는 것 같아 남부끄러웠다. 하지만 인터뷰 제안을 받고 오랫동안 꺼내보지 않았던 사진 앨범이며, 대학의 기록,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인연을 먼지 털고 들여다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잘 살아온 것일까? 내 삶에 정녕 아무런 후회도 없을까?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도 그녀는 잘 살아온 80년의 세월이다.

이제는 한국에서 산 세월보다 스웨덴에서 산 세월이 4배는 더 길어졌다. 그래도 아직 고향 김해의 말을 쓰고, 부산의 물건들을 간직하며, 대한민국의 마음을 품고 있는 자신의 삶이 좋다. 자신이 50년 전에 두고 온 것은 사는 게 고통일 만큼의 비참한 대한민국이었지만 지금은 스웨덴 사람들 앞에서 제법 어깨 으쓱해지는 대한민국이니 그것 또한 근사한 일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8순의 당당한 연금수령자인 천순옥 씨는 자신의 삶이 “꽤 괜찮았다”고 말한다. 스웨덴 스톡홀름 시내 한복판 112년 된 멋진 아파트에서.

[필자 이석원]

25년 간 한국에서 정치부 사회부 문화부 등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지난 2월 스웨덴으로 건너갔다. 그 전까지 데일리안 스팟뉴스 팀장으로 일하며 ‘이석원의 유럽에 미치다’라는 유럽 여행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현재는 스웨덴 스톡홀름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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