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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집에 가자 어머니가 기다려" 말하자 시신의 손이...

목용재 기자
입력 2015.06.25 08:15 수정 2015.06.25 08:39

<12년전 연평해전을 되살리다②-최순조 작가 인터뷰>

"국군통수권자 책임 저버린 DJ에 분노, 이 소설 썼다"

2002 한일월드컵 한국과 터키의 3·4위전을 앞둔 6월 29일 오전. 서해 북방한계선(NLL) 이남 연평도 인근에서 북한 경비정 684호가 남한의 고속정 ‘참수리 357’정에 기습 공격을 감행해 6명의 장병이 전사하고 18명의 장병이 부상을 입는 ‘제2연평해전’이 발발했다. 큰 희생을 치르며 NLL을 지켜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날을 한일월드컵 3·4위전과 결승전이 치러진 날로 기억한다. 당시 목숨을 걸고 NLL을 사수한 장병들과 전사한 장병들의 유가족들만 2002년 6월 29일을 연평해전의 날로 기억할 뿐이다. 데일리안은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해 제2연평해전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편집자 주 >

최순조 영화 '연평해전' 원작 작가.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최순조 영화 '연평해전' 원작 작가.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지난 2007년 여름,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예비후보가 소설 ‘서해해전(연평해전)’의 최순조 작가를 불러 “왜 책 제목을 서해해전으로 붙였습니까”라고 물었다. ‘제2연평해전’이 ‘서해교전’으로 불리던 때였다.

"2002년 서해에서 벌어진 남북 간 전투는 정규군 간의 해상전투였습니다. 6.25전쟁이후 가장 큰 해상전투에 '교전'이라는 단어를 붙여버리면 목숨을 잃어버린 장병들의 희생과 당시 상황·의미를 축소시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서해교전'이라는 명칭을 '해전'으로 바꾸자는 의미에서 제목을 그렇게 지었습니다."

이 만남 이후 들어선 이명박 정부는 2008년 4월 ‘서해교전’으로 불리던 2002년 남북 간 해상 전투를 ‘제2연평해전’으로 새로 명명, 격상시켰다.

최순조 작가는 지난 3일 ‘데일리안’과 인터뷰에서 “당시 이 후보자에게 연평해전이 ‘서해교전’으로 불리는 의미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더니 알지 못했다”면서 “그래서 서해교전을 연평해전으로 명명해야 하는 이유를 이 대통령에게 설명했고 옆에 있던 주호영 의원이 이를 받아 적었다. MB정부가 출범한 이후 연평해전으로 격상됐다”고 말했다.

최 작가는 ‘제2연평해전’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등단했다. 본업은 엔지니어인 특이한 이력의 작가다. "연평해전을 알리기 위해 등단하겠다"고 선언하자 주변사람들이 뜯어 말렸다. 그가 생업을 포기하면서까지 연평해전 집필에 몰두했던 것은 11년여의 해군 부사관 경력, 1983년부터 1984년까지 해군고속정전진기지 근무, 간첩선과 전투 등의 경험들이 무관하지 않다.

특히 제2연평해전에서 희생당한 6인의 용사들의 영결식에 당시 군 통수권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일본으로 축구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출국했다는 당시 상황은 최 작가를 분노케 만들었다.

최 작가는 “사건 후 해군장이라는 이유로 해군참모총장의 윗선들은 단 한 명도 전사자들의 장례식장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면서 “대통령은 나 몰라라 하고 일본으로 축구경기 구경을 갔는데, 이는 대한민국 헌법 74조 1항에 명시된 국군통수권자의 책임을 저버린 중대한 직무유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 작가는 “당시 한국의 언론을 비롯한 사회 각계에서 이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그래서 내가 비록 힘이 없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다가 결국 소설이라는 방법을 선택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최순조 영화 '연평해전' 원작 작가.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최순조 영화 '연평해전' 원작 작가.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하지만 최 작가의 소설 집필은 순탄치 않았다. 자비를 털어 진행한 1년 4개월간의 취재, 6개월 간의 집필 기간 중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연평해전 유가족들을 대면하고 그들의 승낙을 받아 낼 때였다. 당시 연평해전 유가족들은 사고 이후 언론과 사회에 대한 실망감으로 팽배해 있던 상황이었다.

최 작가는 “해군 부사관으로서 11년 2개월을 복무했고 마지막 근무지도 연평도 고속정 전진기지였다는 점을 유가족들에게 알려드리고 전사자들은 내게 후배라는 말을 전해드렸다”면서 “내 후배인 여섯 용사들의 희생을 이대로 묻히게 둘 수 없고, 결코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유가족들을 설득했다”고 말했다.

최 작가가 소설 집필을 위해 취재를 진행하던 중 눈물을 참을 수 없는 순간도 있었다. 끝까지 참수리 357정의 키를 붙잡고 있던 한상국 중사의 시신 수습 이야기를 들었을 때다. 침몰한 참수리 357정이 전복되지 않은 채 가지런히 가라앉은 이유가 한 중사 때문이라는 말도 나온다.

“상국이 실종됐을 때, 시신 수습한 사람이 상국이 훈련소 동기야. 그 녀석이 침몰한 357정 안에 들어갔더니 상국이가 키를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고 하더라고. 시신 훼손 없이 수습해야 하는데 강제로 손 풀었다가는 40여일 동안 물속에 있던 시신이 상하니까. 그래서 속으로 상국이한테 말했대. ‘이제 집에 가자. 어머니 기다리신다’고.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손이 스르륵 풀렸다고 하는 거야. 상국이 수습해서 수면위로 올라가니 무지개까지 떴다고 하더라고.”

여기에 최 작가는 한 중사의 계급을 상사로 추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정돼 있던 중사 진급일에 한 중사가 실종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신 수습이후 추서됐다면 상사로 계급을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최 작가는 “한 중사의 진급일은 7월 1일이었고 8월 9일이 시신을 수습한 날이었다. 시신 수습당시 이미 중사였다”면서 “시신 수습 후 추서된다면 상사로 하는 것이 맞다.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

한편 최 작가는 10일 개봉한 영화 연평해전에 대한 기대감이 높다. 책보다는 영화가 좀 더 대중적으로 사람들에게 연평해전과 그 용사들을 알리기 쉬울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최 작가는 “연평해전을 알리기 위해 등단도 했고, 책을 썼는데, 요즘 사람들이 책 보다는 영화를 많이 보기 때문에 기대를 하고 있다”면서 “흥행에 성공해서 대중들이 2002년 월드컵 당시 우리를 위해 희생한 장병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영화 '연평해전' 스틸컷.ⓒ(주)로제타시네마 영화 '연평해전' 스틸컷.ⓒ(주)로제타시네마
목용재 기자 (morkka@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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