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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와 몽마르트르, 파리를 보는 2가지 관점

이석원 기자 (galamoi@dailian.co.kr)
입력 2014.09.07 10:13 수정 2014.09.07 10:16

<유럽에 미치다 21-프랑스 파리②>찬란한 귀족의 타락과 소박한 서민의 환락

아버지 루이 13세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5살 나이에 왕위에 오른 소년은 어머니 안느 토트리시와 재상 마자랭 추기경의 위세에 어린 시절을 말 뿐인 왕으로 살았다. 할머니 마리 드 메디치가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인 관계로 이탈리아 출신인 마자랭(이탈리아명 마차리니)이 낯설지는 않았던 소년 왕은, 마자랭을 경계하면서도 그를 통해 정치가의 소양을 키우고 있었다.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권모술수와 음흉한 성격을 지닌 탓에 늘 주위에 적이 많았던 마자랭은 귀족들을 손아귀에 쥐고 왕을 대신한 절대 권력을 휘두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오히려 귀족들에게 휘둘렸는데, 소년왕은 그 또한 정치공부의 일환으로 여겼다.

베르사유 궁전 주변의 대저택들. 과거 부르봉 왕조 시대에는 권력을 가진 귀족들이 루이 14세 주변에 모여 살았던 흔적이다. 현재는 관공서나 전시관 등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석원 베르사유 궁전 주변의 대저택들. 과거 부르봉 왕조 시대에는 권력을 가진 귀족들이 루이 14세 주변에 모여 살았던 흔적이다. 현재는 관공서나 전시관 등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석원

베르사유 궁전 주변에 귀족들의 대저택이 즐비한 것은, 조선시대 경북궁 지금의 인사동이나 안국동 일대에 고관대작들의 집이 많이 잇었던 것과 마찬가지 현상일 것이다. 거의 자그마한 궁전 규모를 지닌 이런 대저택들을 보면 당시 프랑스가 귀족들의 나라라는게 실감난다. ⓒ이석원 베르사유 궁전 주변에 귀족들의 대저택이 즐비한 것은, 조선시대 경북궁 지금의 인사동이나 안국동 일대에 고관대작들의 집이 많이 잇었던 것과 마찬가지 현상일 것이다. 거의 자그마한 궁전 규모를 지닌 이런 대저택들을 보면 당시 프랑스가 귀족들의 나라라는게 실감난다. ⓒ이석원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았던 마자랭이 죽었다. 그리고 소년왕은 24살의 성숙한 청년이 됐다. 그는 모후인 안느 토트리시와 마자랭을 추종하던 관리와 귀족들을 죽이거나 쫓아내고 콜베르라는 인물을 재상에 앉히면서 강력한 왕으로의 자리매김을 하기 시작했다. 마자랭이 실패했던 귀족 옭아매기가 우선 과제. 그래서 그는 귀족들이 24시간 자신의 감시와 관측 아래 두려고 파리 남서쪽 20km 떨어진 곳에 거대한 궁전을 짓고 그 궁전 안과 주위에서 살게했다.

귀족들은 왕의 화려하고 찬란한 삶을 보면서 주눅이 들었고, 그런 귀족들에게 왕은 숨을 쉬고 있는 동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사치스럽고 흥청망청한 삶을 살게 해주었다. 심지어 평범한 부부생활에 지루해진 귀족들이 때로는 은밀히, 때로는 공개적으로 다른 귀족 부부나 왕족 부부들과 제 멋대로 잠자리를 할 수 있는 여건까지 만들어줬다. 그렇게 파리의 귀족들은 끝 모를 환락의 낭떠러지로 떨어졌고, 그 위에서 청년이 된 왕은 절대 왕권을 휘둘렀다.

프랑스 절대왕권의 상징이기도 한 베르사유 궁전 앞은 1년 365일 늘 사람으로 가득차 있다. ⓒ이석원 프랑스 절대왕권의 상징이기도 한 베르사유 궁전 앞은 1년 365일 늘 사람으로 가득차 있다. ⓒ이석원

'태양왕' 루이 14세의 청동기마상. 72년을 집권하며 가장 강력한 프랑스를 만들었지만, 또 가장 사치스럽고 화려한 탓에 프랑스의 피폐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의 사실상 원인제공자는 루이 14세"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석원 '태양왕' 루이 14세의 청동기마상. 72년을 집권하며 가장 강력한 프랑스를 만들었지만, 또 가장 사치스럽고 화려한 탓에 프랑스의 피폐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의 사실상 원인제공자는 루이 14세"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석원

프랑스 역사에 있어서 가장 화려한 왕정문화를 꽃피운 루이 14세. 귀족들에게 사치와 향락, 타락한 성 문화와 패륜을 안겨주며 스스로를 ‘태양왕’이라고 칭하게 했던 탁월한 절대자의 시대 그 획기적인 수단이 됐던 것이 바로 베르사유(Versailles) 궁전이었다.

부르봉 왕조를 시작한 ‘미남왕’ 앙리 4세의 손자이자, 루이 13세의 아들로 태어난 루이 14세는 태어났을 때부터 그야말로 금지옥엽이었다. 루이 13세와 안느 토트리시가 결혼하고 무려 23년 만에 낳은 첫 아들이니 오죽했을까? 그러나 루이 13세는 그 소중한 아들이 5살 되던 해 자객의 칼을 맞고 절명한다. 그래서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절대주의의 상징 루이 14세의 시대가 서둘러 열린 것이다.

만약 주말에 베르사유 궁전에 들어갈 계획이라면 아주 이른 아침부터 최소 3, 4시간은 줄 설 각오를 해야한다. 이 많은 사람들이 그 오랜시간을 들여서도 베르사유 입장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봤을 때도 파리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궁전을 지은 루이 14세의 선견지명을 느끼게 된다. ⓒ이석원 만약 주말에 베르사유 궁전에 들어갈 계획이라면 아주 이른 아침부터 최소 3, 4시간은 줄 설 각오를 해야한다. 이 많은 사람들이 그 오랜시간을 들여서도 베르사유 입장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봤을 때도 파리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궁전을 지은 루이 14세의 선견지명을 느끼게 된다. ⓒ이석원

줄서기에 지친 젊은이들은 광잗에서 제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찾아 지루함을 달래기도 한다. 루이 14세 당시 이곳에서는 왕과 귀족을 위한 오페라 공연이 열리기도 했다. ⓒ이석원 줄서기에 지친 젊은이들은 광잗에서 제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찾아 지루함을 달래기도 한다. 루이 14세 당시 이곳에서는 왕과 귀족을 위한 오페라 공연이 열리기도 했다. ⓒ이석원

루이 14세가 19살이던 1662년 어머니 안느 토드리시와 재상 마자랭이 자신을 대신해 국정을 운영하고 있을 때 그는 파리 외곽에 화려한 궁전을 짓도록 명령했다. 부왕의 사냥터였던 곳이다. 그리고 그 궁전이 완성되던 1668년, 그는 마침내 어머니의 섭정을 물리치고 바야흐로 진정한 프랑스의 절대자가 된 것이다.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지은 것은 단지 허울뿐인 왕이던 시절 호화로운 취미생활을 누리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그곳에서 프랑스의 새로운 권력이 탄생할 것을 예감했다. 그 권력은 백성들의 그 어떤 고통보다도 우위에 있는, 귀족들의 그 어떤 원망보다도 우선하는, 심지어는 하느님조차도 보조자로 전락시키는 절대 왕권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멋진 공간으로 꼽히는 '거울의 방' 좌우로 17개의 화려한 거울과 17개의 화려한 창문이 번쩍인다. 홀의 길이만 73m에 이르는 이 방에서는 주로 가면무도회나 왕족의 생일 파티가 열렸다. ⓒ이석원 베르사유 궁전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멋진 공간으로 꼽히는 '거울의 방' 좌우로 17개의 화려한 거울과 17개의 화려한 창문이 번쩍인다. 홀의 길이만 73m에 이르는 이 방에서는 주로 가면무도회나 왕족의 생일 파티가 열렸다. ⓒ이석원

궁전 안에 마련된 부르봉 왕가의 예배당. 루이 14세는 절대적인 왕권을 휘두르면서 한편으로는 사실상 자신이 신앙의 중심이라고 믿기도 했다. 한편 이 예배당에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식이 거행됐다. ⓒ이석원 궁전 안에 마련된 부르봉 왕가의 예배당. 루이 14세는 절대적인 왕권을 휘두르면서 한편으로는 사실상 자신이 신앙의 중심이라고 믿기도 했다. 한편 이 예배당에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식이 거행됐다. ⓒ이석원

베르사이유 궁전의 화려함은 특히 왕과 그 가족들의 침실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이석원 베르사이유 궁전의 화려함은 특히 왕과 그 가족들의 침실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이석원

사실 베르사유 궁전을 막 들어설 때까지는 그런 압도적인 왕권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궁정의 좌우 길이가 600m라 거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독일 뮌헨에 있는 님펜부르크 보다 약간 작다. 화려한 조각과 찬란한 장식이 멋지긴 해도 유럽의 어느 나라 왕궁도 그 보다 크게 부족하지는 않다. 멋지지만 특별한 정도는 아니고, 크지만 압도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궁전 건물을 통과해 정원 쪽에 들어서는 순간, ‘이것이 과연 한 명의 왕을 위한 공간일까?“ 하는 의구심과, 압도적인 풍광에 숨이 멎을 지경이다. 최장 길이가 8km에 달하는 대운하와 그 대운하를 가로지르는 소운하는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십자가다. 부왕이 말을 타고 사냥하던 숲을 통째로 궁전의 정원으로 삼았으니 그 규모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심 공원이라는 뮌헨의 영국 정원이나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는 이 궁전에 비하면 소박한 식물원 수준이다.

베르사유 정원. 오래전 동명의 일본만화로 먼저 익숙해진 공간이다. 당시 유럽 최고의 조경설계가로 유명한 르 노르트의 작품. 이후 전 세계에는 이를 모방한 조경 작업이 유행해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석원 베르사유 정원. 오래전 동명의 일본만화로 먼저 익숙해진 공간이다. 당시 유럽 최고의 조경설계가로 유명한 르 노르트의 작품. 이후 전 세계에는 이를 모방한 조경 작업이 유행해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석원

총 길이 8km에 이르는 베르사유 궁전의 핵심인 대운하. 이 정도 쯤 되면 루이 14세의 스케일이 어느 정도인 지 알 수 있다. 이 대운하에 보트를 띄워좋고 흥청망청 거렸을 것을 생각하면 당시 부르봉 왕가와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이석원 총 길이 8km에 이르는 베르사유 궁전의 핵심인 대운하. 이 정도 쯤 되면 루이 14세의 스케일이 어느 정도인 지 알 수 있다. 이 대운하에 보트를 띄워좋고 흥청망청 거렸을 것을 생각하면 당시 부르봉 왕가와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이석원

“국가, 그것은 바로 짐이다(L'Etat, c'est moi)‘라는 말과 함께 스스로를 ’태양왕‘이라고 칭한 루이 14세는 72년 치세동안 베르사유 궁전을 절대 권력의 요람으로 삼았다. 심지어 1701년부터 1713년까지 12년 동안 벌어진 스페인 계승전쟁 때문에 국가의 재정이 파탄 지경에 이르고 백성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를 기세일 때 혹이라도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귀족이 생길까봐 그는 파리의 모든 귀족을 베르사유에 불러 모아 자신의 감시 속에서 살기를 강요했다. 그러면서 귀족들을 음식과 옷과 섹스로 타락시키고, 무력하게 만들며 자신의 절대 권력을 유지했다. 아무도 그에게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하는 동안 그는 할아버지인 앙리 4세가 선포한 종교관용론인 낭트 칙령 조차 폐기하고, ‘하나의 국왕, 하나의 법, 그리고 하나의 신앙’을 내세워 스스로를 거의 신의 위치에까지 올려놓은 것이다.

베르사유 궁전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급하지 않다. 천천히 여유롭게 풍광을 즐기기도 하고, 그러다가 지치면 운하 주변의 잔디밭에 누워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여유로움이 뭍어난다. ⓒ이석원 베르사유 궁전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급하지 않다. 천천히 여유롭게 풍광을 즐기기도 하고, 그러다가 지치면 운하 주변의 잔디밭에 누워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여유로움이 뭍어난다. ⓒ이석원

부르봉 왕조 당시의 왕족이나 귀족이라도 된 양 운하에서 보트를 즐기는 것도 큰 멋이다. 하지만 적지 않은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석원 부르봉 왕조 당시의 왕족이나 귀족이라도 된 양 운하에서 보트를 즐기는 것도 큰 멋이다. 하지만 적지 않은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석원

베르사유 궁전 안의 또 다른 작은 궁전으로 통하는 그랑 트리아농으로 가는 길.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3세의 사냥터에 있던 자그마한 별장자리에 지은 것이다. 궁전 내부나 정원은 물론 숲길을 걸어 그랑 트리아농이나 프티 트리아농,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은신처라고도 불리는 왕비의 촌락도 큰 볼거리다. ⓒ이석원 베르사유 궁전 안의 또 다른 작은 궁전으로 통하는 그랑 트리아농으로 가는 길.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3세의 사냥터에 있던 자그마한 별장자리에 지은 것이다. 궁전 내부나 정원은 물론 숲길을 걸어 그랑 트리아농이나 프티 트리아농,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은신처라고도 불리는 왕비의 촌락도 큰 볼거리다. ⓒ이석원

베르사유 궁전하면 떠오르는 또 한 명의 인물은 마리 앙투아네트. 루이 14세의 현손(5대손)인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 딸. 어머니의 정략 혼인정책의 희생양이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베르사유 궁전의 안주인이면서도 궁전의 한 귀퉁이 프티 트리아농 안쪽 ‘왕비의 촌락(Hameau de la reine)에 살며 사치와 향락으로 자신을 위로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베르사유에서 끌어내지고, 1793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지금도 베르사유 곳곳에는 이 비운의 왕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루이 14세의 찬란한 영광과 마리 앙투아네트의 비련. 프랑스 역사상 가장 화려한 궁정 문화를 꽃피웠던 베르사유는 인간의 야심이 만들어낸 거대한 욕망덩어리일 것이다. 그 찬연함에 탄성이 나오긴 하지만 결코 고개가 숙여지지는 않는 거친 거만함. 그러나 어쩌면 그 화려한 베르사유에 묻혀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멍청해진 귀족들과 그들의 지배자인 왕 때문에 프랑스 민중들은 좀 더 빨리 현명해지고, 똑똑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위대한 혁명의 역사를 만들어 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베르사유가 왕과 귀족들의 사치와 타락의 공간이었다면 프랑스 평민들을 성적으로 자유롭게 하면서 타락시키기도 했던 곳은 파리 북쪽 몽마르트르(Montmartre)다.

서기 272년 파리의 첫 주교였던 생 드니(St. Denis)가 머큐리 신상을 우상숭배라며 파괴한 죄로 처형당해 묻힌 성지이자 12세기 베네딕트 수녀원이 설립된 이후 수도원의 전통이 지배하던 곳, 그리고 파리 시민들의 모금으로 찬란한 사크레 쾨르 대성당(Basilique du Sacre-Coeur)이 우뚝 선 신성한 언덕이 파리 평민들의 향락과 성적 퇴폐의 온상이었다는 것은 어폐가 있다. 엄밀히 얘기하면 몽마르트르보다도 그 아랫동네인 클리시 거리가 파리 향락과 섹스 문화의 온상이다.

세계에서 성에 대해서는 가장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는 프랑스 사람들의 성에 대한 '톨레랑스'를 보여주는 클리기 거리의 섹스숍들. 그런데 이 길가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아주 간단한 한국말과 일본말, 그리고 중국말을 한다. 예컨대 "이리로 오세요"나 "좋은 구경 하세요" 등. ⓒ이석원 세계에서 성에 대해서는 가장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는 프랑스 사람들의 성에 대한 '톨레랑스'를 보여주는 클리기 거리의 섹스숍들. 그런데 이 길가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아주 간단한 한국말과 일본말, 그리고 중국말을 한다. 예컨대 "이리로 오세요"나 "좋은 구경 하세요" 등. ⓒ이석원

대로에서 민망한 쇼 윈도우를 자랑하는 섹스용품 가게는 프랑스가 얼마나 성에 대해 개방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이들에게 성은 음침하거나 비밀스럽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고 스포츠를 즐기는 것과 같은 놀이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의식이 강하다. 어느 누구도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급하게 이런 가게에 뛰어들어가지 않고, 심지어는 연인이나 부부가 함께 손을 잡고 들어가 쇼핑을 하기도 하니...ⓒ이석원 대로에서 민망한 쇼 윈도우를 자랑하는 섹스용품 가게는 프랑스가 얼마나 성에 대해 개방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이들에게 성은 음침하거나 비밀스럽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고 스포츠를 즐기는 것과 같은 놀이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의식이 강하다. 어느 누구도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급하게 이런 가게에 뛰어들어가지 않고, 심지어는 연인이나 부부가 함께 손을 잡고 들어가 쇼핑을 하기도 하니...ⓒ이석원

길 양 옆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섹스용품 가게와 온갖 퇴폐적인 음란쇼를 보여주는 소규모 변태 극장들, 이 곳은 억눌린 욕망에 찌들었던 19세기 말 20세기 초 파리의 시민과 가난한 예술가들이 술과 음악과 연애로 밤을 지새우던 문화 위에 저속한 성 문화가 덧입혀진 공간이다.

유교적 관념과 도덕주의에 투철한 동양인들에게는 대낮이라도 이 길을 지나가는 게 편치만은 않다. 줄줄이 늘어선 가게의 쇼 윈도우에는 똑바로 쳐다보기에도 민망한 각종 섹스용품이 조금의 가려짐도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고, 헐벗은 여인들의 사진이 어지럽게 전시된 작은 극장 앞에서는 지나가는 여행자들을 불러 세우는 호객꾼들의 비릿한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몽마르트르 언덕을 가겠다고 메트로 블랑쉐(Blanche) 역에서 내리자마자 맞닥뜨리는 이 같은 장면은 파리를 처음 찾는 동양의 여행자들에게는 당혹감과 민망함의 시작이기도 하다. 프랑스 사람들이 세계에서 성적으로 가장 개방됐고, 포르노 영화조차 예술로 인정받는 곳이라고 익히 들어왔다고 해서 이런 거리의 풍경이 거리낌 없이 수용되지는 않는다.

앙증맞은 빨간 풍차가 눈에 띄는 파리의 대표적인 캬바레 물랭루즈. 파리 근현대사에 수많은 이야기와 사건을 담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입장료가 너무 비싸다. ⓒ이석원 앙증맞은 빨간 풍차가 눈에 띄는 파리의 대표적인 캬바레 물랭루즈. 파리 근현대사에 수많은 이야기와 사건을 담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입장료가 너무 비싸다. ⓒ이석원

그런데 이 거리가 원래부터 이랬을 리는 만무하다. 19세기 말부터 피카소를 비롯해 로트렉이나 베를리오즈, 살바토레 달리 같은 예술가들이 몽마르트르에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이곳에는 캬바레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중년의 시장바구니를 든 아주머니들이 제비족과 ‘뺑뺑이’를 도는 오늘날의 캬바레와는 사뭇 다른, 그래서 굳이 ‘뮤직홀’이라고 불리는 당시의 캬바레는 술과 음악, 그리고 예술가들의 대화로 가득한 곳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캉캉춤’으로 대변되는 다소 ‘야한’ 공연 문화의 공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1881년 문을 연 캬바레 ‘르 새 누아르’를 시작으로 ‘라팽 아질’과 ‘물랭 루즈’에 이르기까지 클리시 거리의 캬바레 문화는 위에서 거론한 예술가들 외에도 화가 모딜리아니, 시인 아폴리네르, 그리고 세계 1차 대전이후 전쟁의 시기에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과 가수 에디트 피아프까지 파리의 난다 긴다는 유명인사들을 몽마르트르 주변으로 불러 모았던 것이다.

메트로 블랑쉐 역에서 내려 다소 민망한 표정으로 클리시 거리를 걸어 지붕 위 붉은 풍차가 눈에 띄는 물랭 루즈를 보고나서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면 겨우 해발 130m로 파리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몽마르트르 언덕이 나온다. 언덕을 오르는 길에 잠시 만날 수 있는 곳은 초현실주의 화가인 살바토레 달리 미술관과 100여 년 전 그 예술가들이 모여 살았다는 아파트들.

몽마르트르가 몽마르트르인 이유는 사실 이 곳 테르트르 광장 때문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피카소를 비롯해 달리나 로트렉 등이 이 곳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예술의 공간이 됐던 것이다. ⓒ이석원 몽마르트르가 몽마르트르인 이유는 사실 이 곳 테르트르 광장 때문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피카소를 비롯해 달리나 로트렉 등이 이 곳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예술의 공간이 됐던 것이다. ⓒ이석원

지금의 테르트르 광장은 무명의 숨겨진 예술가들의 공간이라기 보다 장삿속에 물든 얄팍한 그림 사기꾼들의 광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퇴락해 있다. 실제 돈 보다 예술을 담고자 하는 예술가들은 20세기 중반 이후 몽파르나스 쪽으로 이주했다. 북쩍이는 거리의 화가들과 즐비한 기념품 가게, 이제는 멋과 낭만을 즐기는 파리 시민보다 외국의 여행자들의 공간으로 뒤바뀐 씁슬함이 있는 공간이다. ⓒ이석원 지금의 테르트르 광장은 무명의 숨겨진 예술가들의 공간이라기 보다 장삿속에 물든 얄팍한 그림 사기꾼들의 광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퇴락해 있다. 실제 돈 보다 예술을 담고자 하는 예술가들은 20세기 중반 이후 몽파르나스 쪽으로 이주했다. 북쩍이는 거리의 화가들과 즐비한 기념품 가게, 이제는 멋과 낭만을 즐기는 파리 시민보다 외국의 여행자들의 공간으로 뒤바뀐 씁슬함이 있는 공간이다. ⓒ이석원

지금은 테르트르 광장으로 불리지만 예전에는 그냥 몽마르트르 광장으로 불리던 곳은 지금도 거리의 화가들 천지. 피카소나 달리, 모딜리아니도 바로 이 곳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지금의 거리 화가들은 성격이 좀 다르다. 모두가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다수의 거리 화가들은 예술적인 열정을 불사르는 순수함 보다는 어설픈 외국의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싸구려 상술을 부린다.

빠른 손놀림으로 사람들의 초상화나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것을 구경하다보면 어느새 손재줏꾼 하나가 종이를 오려서 내 얼굴이라며 들이대고 돈을 달란다. 그것도 보통 30에서 40유로. 우리 돈으로 4~5만원이 넘는 금액이다. 정식으로 초상화라도 그리려면 최소 70에서 100유로는 줘야 한다. 6, 70년대 눈 시퍼렇게 뜬 이 코 베어가던 서울역의 사기꾼이 무색해질 지경이다.

사크레 쾨르 대성당. '신성한 마음, 즉 성심'이라는 뜻을 지닌 이 성당은 보불 전쟁의 패배로 위축된 파리 시민들이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파리에서도 가장 높은 몽마르트르 언덕, 그 중에서도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성지인 생 드니의 무덤에 세운 의미심장한 곳이다. ⓒ이석원 사크레 쾨르 대성당. '신성한 마음, 즉 성심'이라는 뜻을 지닌 이 성당은 보불 전쟁의 패배로 위축된 파리 시민들이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파리에서도 가장 높은 몽마르트르 언덕, 그 중에서도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성지인 생 드니의 무덤에 세운 의미심장한 곳이다. ⓒ이석원

그러나 그 난장판만 무사히 잘 지나가면 눈부시도록 새하얀 아름다움이 빛나는 사크레 쾨르 대성당을 만날 수 있고, 또 그 앞 계단 아래에서 펼쳐지는 세계 젊은이들의 싱그러운 열정과 또 그 뒤로 펼쳐지는 파리의 드넓은 풍광을 만날 수 있다. 파리는 20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도시지만 늘 그 공간을 채우는 젊은 영혼들을 스스로 내뿜는 뜨거운 열정으로 파리를 언제나 젊은 예술의 도시로 재탄생 시키고 있다.

몽마르트르는 말 그대로 마르트르 산이라는 뜻. 생 드니의 순교를 기억하며 ‘순교자의 산(Mont des Martyrs)’ 또는 ‘머큐리의 산(Mont Mercure)’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알려졌다. 이곳에 우뚝 서 있는 사크레 쾨르 대성당은 교회가 아닌 시민의 힘으로 세워진 성당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프로이센과의 전쟁(보불 전쟁)에서 패한 후 깊은 자괴감에 빠져있던 파리의 시민들은 스스로 돈을 모아 국운을 융성하게 하고 사기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비잔틴 양식의 이 거대한 성당을 짓는다. 파리 시내가 굽어보이는 이곳에 세워진 성당은 실제 파리 시민은 물론 프랑스 국민 모두에게 큰 자부심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이 대성당은 또 다른 참혹한 피비린내 위에 세워진 것이기도 하다.

보불 전쟁에서 패하고 나폴레옹 3세의 제2 제정이 무너진 후 제3 공화정이 수립됐지만 파리 시민들의 피폐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프로이센에 빌붙어 권력을 누리려던 제3 공화정 정부는 프로이센에 대한 전쟁 피해보상금 등을 위해 파리 시민들의 목을 조른다. 마침 사회주의 운동까지 벌어지던 파리에서 시민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봉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봉기한 곳이 몽마르트르이고, 역사는 그들을 파리 코뮌(Paris Commune)이라고 부른다.

사크레 쾨르 대성당의 내부 ⓒ이석원 사크레 쾨르 대성당의 내부 ⓒ이석원

1871년 3월 말 봉기해 파리를 장악한 채 무정부 상태에서 자치 정부를 운영한 파리 코뮌은 정확히 3개월 후 베르사유에서 진격한 정부군에 의해 참혹한 최후를 맞는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1000여명의 파리 코뮌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대체로 역사는 최소 3만 명의 파리 시민들이 정부군의 기관총에 무참히 희생됐다고 적고 있다. 몽마르트르에서 봉기해 3개월 후 페르 라 세즈 묘지의 비석을 등지고 최후의 파리 코뮌이 죽을 때까지 파리는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정부 상태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5년 뒤 몽마르트르 언덕 꼭대기에 건설을 시작한 사크레 쾨르 대성당이다 보니 한편의 사람들은 “순교자의 산에 세워진 파리 코뮌의 성당”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파리 코뮌 이후 프랑스 정부는 공식적으로 행정구역명으로의 파리를 없애고 파리 시장을 뽑지 않기 시작했다. 1977년 자크 시라크가 파리 시장에 뽑힌 게 106년만의 일인 것이다.

사크레 쾨르 대성당 앞 계단은 파리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자유로운 문화의 공간이고 휴식처이다. 이 곳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젊은이들이 늘 무언가를 공연하고, 또 그보다 더 많은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그들의 길거리 문화를 보면서 휴식을 취한다. 멀리 파리 시내의 전경이 펼쳐진다. ⓒ이석원 사크레 쾨르 대성당 앞 계단은 파리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자유로운 문화의 공간이고 휴식처이다. 이 곳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젊은이들이 늘 무언가를 공연하고, 또 그보다 더 많은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그들의 길거리 문화를 보면서 휴식을 취한다. 멀리 파리 시내의 전경이 펼쳐진다. ⓒ이석원

관용과 자유로움의 도시 파리. 사랑과 낭만의 천국 파리.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정신으로 전 세계를 전염시키 혁명의 도시 파리. 파리를 수식하는 말은 파리의 멋진 공간 만큼 무수히 많다. 다만 파리를 보는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들의 멋과 느낌으로 파리를 수식한다. ⓒ이석원 관용과 자유로움의 도시 파리. 사랑과 낭만의 천국 파리.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정신으로 전 세계를 전염시키 혁명의 도시 파리. 파리를 수식하는 말은 파리의 멋진 공간 만큼 무수히 많다. 다만 파리를 보는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들의 멋과 느낌으로 파리를 수식한다. ⓒ이석원

사크레 쾨르 대성당을 등지고 계단 위에 앉아서 파리 시내를 보고 있으면 파리는 서유럽 대부분의 도시들처럼 그저 평범한 벌판 위에 세워진, 특별한 감동이나 환희가 없는 대도시일 뿐이다. 자기 식대로 편안해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나 눈치는 신경 쓰지 않으며, 또 굳이 남의 인생에 개입하는 것도 불필요하게 여기는 냉소주의가 서려있다. 하지만 이를 냉소주의라기보다 불간섭의 관용이고, 스스로의 행복에 대한 무한 책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개인주의로 보이는 자기중심의 사고는 세상 그 어느 곳보다 뛰어난 예술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남에 대한 관용과 배려를 무시한 귀족주의의 상징인 베르사유와 톨레랑스가 무너지는 것에 분노한 민심이 무정부 상태를 만들어냈던 몽마르트르의 파리 코뮌이 특별한 차이 없이 함께 찬란한 파리의 정신을 유지하는 것, 어쩌면 그것 자체가 그들이 성경 구절처럼 가슴에 박고 사는 ‘자유 평등 박애’의 혁명 정신이 아닐까?

글/이석원 여행작가·기자

이석원 기자 (galamoi@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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