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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처럼 살다간 전혜린, 그녀가 죽도록 사랑한 곳

이석원 기자 (galamoi@dailian.co.kr)
입력 2014.08.24 10:06 수정 2014.09.02 14:49

<유럽에 미치다 19-독일 뮌헨>유럽 최고의 궁전 문화에서 치욕의 네거티브 역사까지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의 주도, 알프스 끝자락에서 드넓은 평원이 시작되는 곳, 과거 로마제국이 유럽 깊숙이 뛰어들기 위해 거쳤고, 또 로마로 가기 위해서 지나야 했던 곳. 유럽 최대 인구를 보유한 독일에서도 세 번째로 큰 도시 뮌헨으로의 여행은 조금은 신선하고 신비롭다.

중부 유럽의 중심 국가인 독일 ⓒ데일리안 중부 유럽의 중심 국가인 독일 ⓒ데일리안

세계 4대 프로축구 리그 중 하나인 분데스리가 전통의 최강팀 바이에른 뮌헨 때문에도 그렇게 낯설지 않은 곳이지만, 그렇다고 정작 주변에서 뮌헨을 다녀온 사람을 찾으려고 하면 흔치 않다. 그리고 여행보다는 비즈니스로, 예술과 문화보다는 BMW로 대변되는 산업의 이미지가 강한 도시. 그런데 알고 보면 이 도시는 기막히게 멋지고 아름답고 싱그러운 곳이다.

1인당 소득이 4만 달러가 넘는 독일에서도 뮌헨의 1인당 소득은 5만 5000달러에 이른다. 베를린이나 프랑크푸르트보다 훨씬 잘 사는 도시다. 140만 명의 인구 중 외국인이 35만 명, 즉 4분의 1에 이를 정도로 외국인이 살기 가장 좋은 도시로 꼽힌다. 다른 유럽국가나 미국 등지에서 ‘최고의 이민 희망지역’으로 꼽는 곳이 뮌헨이다.

오스트리아 쪽의 알프스가 북동쪽으로 흘러내리면서 대평원 지역과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뮌헨. 남쪽을 제외하고 뮌헨의 전 지역은 야트막한 산 하나 없는 완벽한 평지를 이루고 있다. 심지어 BMW 본사 건물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현대식 고층 건물도 없어서 독일 제3의 도시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소박한 느낌을 준다. ⓒ이석원 오스트리아 쪽의 알프스가 북동쪽으로 흘러내리면서 대평원 지역과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뮌헨. 남쪽을 제외하고 뮌헨의 전 지역은 야트막한 산 하나 없는 완벽한 평지를 이루고 있다. 심지어 BMW 본사 건물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현대식 고층 건물도 없어서 독일 제3의 도시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소박한 느낌을 준다. ⓒ이석원

100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도시 중 가장 자연환경이 깨끗한 곳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곳. 삶의 질에 있어서도 매해 전 세계 5위권을 유지하는 곳. 그런데 그런 자랑스런 수치와 기록들 보다 뮌헨을 더 재밌고 신나게 만드는 것은, 독일의 찬란한 문화를 한껏 보여주면서도, 처절하리만치 비참한 네거티브 역사로 통증을 느끼기도 하는 곳이라는 점이다.

뮌헨으로의 여행은 구시가지의 중심점인 마리엔 광장(Marienplatz)에서 시작한다. 마리엔 광장은 뮌헨의 신시가지와 구시가지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뮌헨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곳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뮌헨의 신시가지와 구시가지의 경계를 이루는 마리엔 광장은 가장 활기차고 신바람 나는 공간이다. 노천카페와 호프들이 즐비하고, 1년 365일 거리의 악사와 행위예술가들이 실력을 뽐내면서 여행자들에게 특별한 즐거움을 준다. ⓒ이석원 뮌헨의 신시가지와 구시가지의 경계를 이루는 마리엔 광장은 가장 활기차고 신바람 나는 공간이다. 노천카페와 호프들이 즐비하고, 1년 365일 거리의 악사와 행위예술가들이 실력을 뽐내면서 여행자들에게 특별한 즐거움을 준다. ⓒ이석원

마리엔 광장은 보행자 전용,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한 여름의 휴가 시즌이 아니더라도 뮌헨의 젊은이들은 물론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로 가득하다. 노천카페며 아이스크림 가게, 자그마한 거리의 호프(Hof)에는 낮이든 밤이든 웃고 떠들고 즐긴다. 그저 길거리 노천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 한 잔을 시켜 놓고 홀로 몇 시간을 있어도 지루하거나 따분하지 않다.

네오고딕 양식으로 보는 이들의 시선을 압도하는 뮌헨 시청사. 건물 곳곳에는 뮌헨의 여러 성인들과 왕족들이 조각돼 있고, 그들의 표정은 수 많은 인간 군상의 표정을 다양하게 담았다고 한다. ⓒ이석원 네오고딕 양식으로 보는 이들의 시선을 압도하는 뮌헨 시청사. 건물 곳곳에는 뮌헨의 여러 성인들과 왕족들이 조각돼 있고, 그들의 표정은 수 많은 인간 군상의 표정을 다양하게 담았다고 한다. ⓒ이석원

시청사를 배경으로 한 성모 마리아 조각. 마리엔 광장이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면서 이 성모 마리아의 조각이 뮌헨의 중심점을 표시하기도 한다. 성모 마리아는 뮌헨의 수호성인이기도 한다. ⓒ이석원 시청사를 배경으로 한 성모 마리아 조각. 마리엔 광장이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면서 이 성모 마리아의 조각이 뮌헨의 중심점을 표시하기도 한다. 성모 마리아는 뮌헨의 수호성인이기도 한다. ⓒ이석원

마리엔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여행자의 시선을 압도하는 것은 노천카페나 호프가 아니다. 최고 높이 85m의 뾰족한 첨탑을 지닌 네오고딕 양식의 시청사다. 사전 지식 없이 이 건물을 보면 그 고색창연한 위용에 입이 떡 벌어지며 적어도 500년은 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건물은 1909년 완공됐다. 이제 100년이 조금 지난 새 건물인 셈이다. 하지만 날선 바늘처럼 하늘로 치솟아 오른 여러 개의 첨탑과, 건물 외벽을 둘러싸고 섬세한 묘사된 조각품, 그리고 회백색의 바랜 외관은 100년 조금 넘은 건물이라는 것이 좀처럼 믿겨지지 않는다.

시청사의 또 다른 볼거리인 클로켄슈필. 프라하의 천문시계를 본 떠 만든 것이다. 그러나 사실 너무 높은 위치에 있어 어지간히 눈이 좋은 사람이거나 망원경이나 망원렌즈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인형들의 움직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석원 시청사의 또 다른 볼거리인 클로켄슈필. 프라하의 천문시계를 본 떠 만든 것이다. 그러나 사실 너무 높은 위치에 있어 어지간히 눈이 좋은 사람이거나 망원경이나 망원렌즈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인형들의 움직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석원

시청사 시계탑에는 낯설지 않은 것이 있다. 매일 오전 11시와 정오, 그리고 여름에는 오후 5시 맑은 종소리와 함께 인형들의 춤이 시작되는 글로켄슈필(Glockenspiel)이다. 윗부분은 16세기 중엽 이 곳에서 열린 빌헬름 5세의 결혼식 피로연을 묘사한 인형의 춤이, 아랫부분에는 16세기 초 뮌헨의 인구 3분의 1이 목숨을 잃은 페스트가 종식된 것을 기념하는 인형의 춤판이 벌어진다. 체코 프라하에 있는 천문시계와 비슷한 아이디어를 가진 시계인 셈이다.

마리엔 광장에서 시청사와 더불어 대표적인 건물이 프라우엔 성당(Frauenkirche)이다. 시청사 오른쪽을 끼고 돌면 야트막한 연못이 있는 작은 광장이 나오고, 그 광장이 너무 작게 보이는 거대한 성당의 쌍둥이 종탑이 나온다.

쌍둥이 종탑을 가진 프라우엔 성당. 뮌헨의 랜드마크이기도 하다. 그러나 높이가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왼쪽 북탑은 99m, 오른쪽 남탑은 100m이다. 남탑의 전망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를 수 있는데, 시청사 첨탑 전망대, 올림픽 공원 내 올림피아드 타워 전망대와 더불어 뮌헨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석원 쌍둥이 종탑을 가진 프라우엔 성당. 뮌헨의 랜드마크이기도 하다. 그러나 높이가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왼쪽 북탑은 99m, 오른쪽 남탑은 100m이다. 남탑의 전망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를 수 있는데, 시청사 첨탑 전망대, 올림픽 공원 내 올림피아드 타워 전망대와 더불어 뮌헨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석원

뮌헨(München)은 가톨릭 수도사들이 세운 도시다. 12세기 말 작센과 바이에른의 대공인 ‘사자공’ 하인리히는 베네딕토 수도회 소속의 수도사들에게 이자르 강을 따라 잘츠부르크에서부터 시장을 만들라는 지시를 한다. 그리고 1255년 당시 바이에른을 지배하던 비텔스바흐 가문은 뮌헨을 바이에른 공국의 수도로 삼는다. 그래서 뮌헨의 휘장에는 수도사들이 새겨져 있고, 도시의 이름 뮌헨도 ‘수도승들의 공간’이라는 뜻의 ‘Munichen’에서 유래했다.

뮌헨을 건설한 베네딕토 수도사들의 흔적은 지금도 뮌헨에 남아 있다. 뮌헨에서 남서쪽으로 30분 정도를 차로 가면 나오는 상트 오틸리엔 마을은 베네딕토 수도원이 마을 자체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말하자면 뮌헨을 건설한 수도사들의 전통을 잇는 수도원이다.

그런데 이 마을 성당에는 한국의 흔적도 있다. 성당 내부에는 한국 최초 가톨릭 사제인 김대건 신부상이 있고, 성당 바깥에 있는 작은 박물관에는 한국관이 따로 마련돼 있어 20세기 초 베네딕토 사제들이 한국에서 선교를 하면서 가져간 물건들이 가지런히 전시돼 있다. 또 당시 선교 활동을 하면서 한국인들의 삶을 담은 사진 자료와 한글로 번역된 성경도 전시돼 있다.

1488년 바이에른 지방에서는 가장 큰 규모로 지어진 고딕 양식의 프라우엔 성당은, 뮌헨의 주교좌 성당이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내부를 지니고 있다. ⓒ이석원 1488년 바이에른 지방에서는 가장 큰 규모로 지어진 고딕 양식의 프라우엔 성당은, 뮌헨의 주교좌 성당이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내부를 지니고 있다. ⓒ이석원

프라우엔 성당 내부에 있는 검은 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루드비히 4세의 석관. ⓒ이석원 프라우엔 성당 내부에 있는 검은 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루드비히 4세의 석관. ⓒ이석원

아무튼 이런 뮌헨의 전통은 16세기 이후 독일이 종교개혁의 태풍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뮌헨이 신교인 프로테스탄트가 아닌 가톨릭 전통이 깊이 남게 되는 배경이 됐고, 프라우엔 성당은 뚜렷한 그 증거로 더 큰 의미를 담고 있다.

프라우엔 성당 안에는 또 한 명의 인물의 조각이 양각돼 있다. 전임 교종이자 살아서 교종에서 물러난 인물인 베네딕토 16세다. 그는 가톨릭의 수장인 교종이 되기 전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으로 프라우엔 성당에서 뮌헨 대교구장 역할을 했다. 그가 교종이 된 후 이름을 베네딕토라고 지은 것도 뮌헨이 베네딕토 수도회의 본산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뮌헨이나 바이에른에 있어서 상당히 유의미한 또 하나의 인물은 막시밀리언 1세다. 1799년부터 1825년까지 바이에른을 통치한 막시밀리언 1세는 집권 초기까지만 해도 제후국에 불과하던 바이에른을 명실공히 왕국으로 창건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 방법이 개운하지만은 않다. 스스로 왕국을 선포했다기 보다는 아주 ‘센’ 자의 도움을 받았다. 1806년 막시밀리언 1세는 자신의 딸을 프랑스 나폴레옹의 아들에게 시집보낸다. 말하자면 당시 사실상 전 유럽의 지배자와 사돈 관계를 맺고 그 대가로 왕국으로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막스 요제프 광장. 광장 한 가운데 제후국에 불과했던 바이에른을 명실공히 왕국으로 만든 막스밀리언 1세의 동상이 서 있다. 막스밀리언 1세는 1806년 자신의 딸을 나폴레옹의 아들에게 시집보내고 왕국의 지위를 얻었다. 동상 뒤로 보이는 것은 국립오페라극장이다. ⓒ이석원 막스 요제프 광장. 광장 한 가운데 제후국에 불과했던 바이에른을 명실공히 왕국으로 만든 막스밀리언 1세의 동상이 서 있다. 막스밀리언 1세는 1806년 자신의 딸을 나폴레옹의 아들에게 시집보내고 왕국의 지위를 얻었다. 동상 뒤로 보이는 것은 국립오페라극장이다. ⓒ이석원

막시밀리언 1세의 동상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막스 요제프 광장은 서울의 광화문 광장과 비슷한 느낌이다.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의 동상이 서 있는 광장 바로 뒤에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 있고. 그 옆으로 세종문화회관이 있듯, 막스 요제프 광장에는 1385년부터 1918년까지 533년 동안 바이에른을 통치한 비텔스바흐 가문의 정궁인 레지덴츠 궁전이 있고, 그 옆으로 국립오페라극장이 있으니 말이다.

바이에른 공국의 지배자 비텔스바흐 가문의 정궁이었던 레지덴츠 궁전. 뮌헨 구시가지 끄트머리에 위치했는데, 독일 궁전 문화의 화려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곳이다. ⓒ이석원 바이에른 공국의 지배자 비텔스바흐 가문의 정궁이었던 레지덴츠 궁전. 뮌헨 구시가지 끄트머리에 위치했는데, 독일 궁전 문화의 화려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곳이다. ⓒ이석원

레지덴츠 궁전의 메인홀. 길이만 88m에 이른다. 현재도 뮌헨 주정부의 공식 연회장으로 쓰이고, 하룻 밤 1만 유로, 우리 돈으로 약 1400만원을 내면 개인에게도 연회장으로 임대하기도 한다. ⓒ이석원 레지덴츠 궁전의 메인홀. 길이만 88m에 이른다. 현재도 뮌헨 주정부의 공식 연회장으로 쓰이고, 하룻 밤 1만 유로, 우리 돈으로 약 1400만원을 내면 개인에게도 연회장으로 임대하기도 한다. ⓒ이석원

레지덴츠에서 가장 큰 규모의 방인 연회실은 1569년부터 1572년까지 3년에 걸쳐 지어졌는데, 방의 양 옆에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주요한 인물들의 흉상이 놓여져 있다. ⓒ이석원 레지덴츠에서 가장 큰 규모의 방인 연회실은 1569년부터 1572년까지 3년에 걸쳐 지어졌는데, 방의 양 옆에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주요한 인물들의 흉상이 놓여져 있다. ⓒ이석원

레지덴츠 궁전의 주인이었던 비텔스바흐 가문은 1385년부터 1918년까지 뮌헨을 중심으로 한 바이에른을 지배했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처럼 화려한 궁전 문화를 꽃피웠다. ⓒ이석원 레지덴츠 궁전의 주인이었던 비텔스바흐 가문은 1385년부터 1918년까지 뮌헨을 중심으로 한 바이에른을 지배했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처럼 화려한 궁전 문화를 꽃피웠다. ⓒ이석원

레지덴츠 궁전(Residenz Museum)은 독일 궁전문화의 정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술성이 돋보이는 프레스코화를 비롯해 휘황찬란한 양탄자와 초상화들, 그리고 동서양의 뛰어난 도자기에 이르기까지 궁전 전체가 마치 보물창고 같은 기분이 든다. 특히 바이에른이 왕국의 지위를 얻고 난 후 막시밀리언 1세부터는 왕관과 휘장, 다양한 장신구와 옷에 이르기까지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퍼부었다. 그 덕에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레지덴츠 궁전은 유럽의 그 어떤 궁전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보물을 보유할 수 있었다.

그런데 레지덴츠 보다 한 수 더 뜬 궁전이 있다. 뮌헨 구시가지에서 조금 벗어난 이자르 강 유역에 있는 님펜부르크 궁전(Schloss Nymphenburg)다. 비텔스바흐 가문의 여름 별궁인 이 궁전이 지어진 것은 1664년 무렵. 당시 이탈리아 출신의 왕비가 심하게 외로움을 타자 향수를 달래주기 위해 이탈리아의 유명한 건축가인 아고스티노 바레리를 데려다 지었다.

비텔스바흐 가문의 여름 궁전인 님펜부르크. 녹음 짙은 숲과 짙고 푸른 호수에 둘러싸인 님펜부르크 궁전은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이유, 오스트리아 빈의 쇤부른과 함께 유럽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궁전으로 통한다. ⓒ이석원 비텔스바흐 가문의 여름 궁전인 님펜부르크. 녹음 짙은 숲과 짙고 푸른 호수에 둘러싸인 님펜부르크 궁전은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이유, 오스트리아 빈의 쇤부른과 함께 유럽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궁전으로 통한다. ⓒ이석원

님펜부르크는 ‘요정(님프)의 성’이라는 뜻이다. 왕비가 직접 지었다. 그런데 이 궁전의 정원을 보고 있자면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이나 오스트리아 빈의 쉰부른 궁전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실 베르사유가 님펜부르크 보다는 약간 먼저 짓기 시작했지만 워낙 두 궁전 다 완공까지는 적잖은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을 누가 모방했는지 밝혀내기가 쉽지는 않다. 다만 일부 기록에는 베르사유의 정원을 완성한 정원예술가가 님펜부르크에도 초대돼 정원을 완성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긴 한다.

그런데 님펜부르크는 베르사유, 쇤부른과 함께 유럽 3대 궁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님펜부르크에 매료된 호사가들이 제 멋대로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들에 비견될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다. 더욱이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처럼 당시 전 유럽에 세력을 과시하던 대제국에 비해 바이에른은 크지 않은 제후국에 불과했는데도 그들에 버금가는 궁전을 지었다는 것은 바이에른의 궁전 문화가 최상급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님펜부르크 궁전 내 왕가의 마굿간이 있었던 곳에 전시돼 있는 루드비히 2세의 마차. 백조의 성으로도 불리는 뮌헨 인근 퓌센에 있는 노이슈반슈타인성을 지은 루드비히 2세는 동화 속의 왕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래서일까? 그가 타던 마차조차 금으로 정밀하게 세공돼 화려함이 상상 이상이다. ⓒ이석원 님펜부르크 궁전 내 왕가의 마굿간이 있었던 곳에 전시돼 있는 루드비히 2세의 마차. 백조의 성으로도 불리는 뮌헨 인근 퓌센에 있는 노이슈반슈타인성을 지은 루드비히 2세는 동화 속의 왕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래서일까? 그가 타던 마차조차 금으로 정밀하게 세공돼 화려함이 상상 이상이다. ⓒ이석원

님펜부르크 궁전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공간인 쉔하이츠 갤러리. 미인의 방으로도 불리는데, 루드비히 1세가 궁정화가에게 당시 뮌헨의 미인 36명의 초상화를 그리게 해서 이 방을 꾸몄다. 초상화 중에는 파리의 댄서로 활동하다가 루드비히 1세의 정부가 된 로라 몬테스의 것도 있다. ⓒ이석원 님펜부르크 궁전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공간인 쉔하이츠 갤러리. 미인의 방으로도 불리는데, 루드비히 1세가 궁정화가에게 당시 뮌헨의 미인 36명의 초상화를 그리게 해서 이 방을 꾸몄다. 초상화 중에는 파리의 댄서로 활동하다가 루드비히 1세의 정부가 된 로라 몬테스의 것도 있다. ⓒ이석원

건물 전체의 폭이 700m에 이르는 것은 분명 베르사유나 쇤부른보다 오히려 더 크고 웅장함을 증명한다. 전통적인 바로크 양식의 궁전은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되는데는 자그마치 230여년의 시간이 소요됐다. 말하자면 바이에른 왕국이 존속하는 내내 이 궁전을 증개축이 이뤄졌고, 그만큼 엄청난 재정이 쏟아 부어졌다는 뜻이다.

바이에른의 왕들 중 이 궁전을 특별히 아끼고 사랑했던 이가 루드비히 2세인데, 이 사람 또한 아주 특별한 데가 있는 인물이다. 1864부터 1886년까지 재위한 루드비히 2세는 원래 심약하고, 늘 몽상과 꿈속에서 살던 인물이다. 특히 왕위에 오르고 2년 만에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그는 심한 우울증까지 앓으면 나라 일을 거의 돌보지 않고 점점 더 몽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런 그는 당시 독일 최고의 작곡가로 추앙받던 바그너와 교류했는데,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속 백조의 전설에 푹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국고는 바닥을 드러내는 판에 루드비히 2세는 뮌헨에서 기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알프스 자락 퓌센에 ‘로엔그린’ 속 백조의 모습을 닮은 성을 짓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성의 완성이 목전에 다가왔을 때 성 아래 스탄베르크 호수에 빠져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사람들은 성을 짓느라 국고를 탕진한 왕에게 불만이 쌓여 “성을 짓다가 왕이 미쳐서 호수에 빠져 죽었다”는 말을 만들기도 했다. 루드비히 2세가 심혈을 기울여 지은 성이 바로 노이슈반슈타인성(Schloss Neuschwanstein)이고, 미국 디즈니랜드의 상징이 된 그 성이다.

영국정원(3.7㎢)은 뉴욕의 센트럴파크(3.41㎢)보다도 넓다. 도심 공원으로는 세계 최고 규모다. 비어가르텐에서 생맥주를 즐기는 사람, 이자르 강변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 등 뮌헨 시민들에게는 최고의 휴식공간이다. ⓒ이석원 영국정원(3.7㎢)은 뉴욕의 센트럴파크(3.41㎢)보다도 넓다. 도심 공원으로는 세계 최고 규모다. 비어가르텐에서 생맥주를 즐기는 사람, 이자르 강변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 등 뮌헨 시민들에게는 최고의 휴식공간이다. ⓒ이석원

뮌헨은 앞서 언급했듯이 독일에서도 가장 부유한 도시다. 사람들은 늘 여유가 있고, 도시 전체를 통틀어 빈부 차이가 거의 없다. 간혹 길에서 구걸을 하는 노숙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럽의 대도시에서 흔히 보는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에 띄게 부유해 보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소박하고 단정하며 적당히 절약하고 또 그러면서도 부족하지 않게 쓰며 여유로운 삶을 산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도시라는 영예를 지니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 뮌헨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공간이 영국 정원((Englisher Garten)이다. 뉴욕의 센트럴 파크보다도 조금 더 큰 면적을 지닌 영국 정원은 도심 공원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다.

백조의 성, 백조의 호수, 백조에 미친 왕. 루드비히 2세에 대한 이미지 때문일까? 영국 정원 곳곳에는 한가롭게 노니는 백조의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이석원 백조의 성, 백조의 호수, 백조에 미친 왕. 루드비히 2세에 대한 이미지 때문일까? 영국 정원 곳곳에는 한가롭게 노니는 백조의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이석원

알프스에서 발원한 이자르 강은 빙하가 녹아 내린 물인 탓에 늘 에머랄드빛이 신비롭다. 하지만 영국 정원 내 이자르강변에서 더 신비로운 것은 아무런 꺼리낌없이 알몸으로 일광역을 즐기는 뮌헨 시민들의 모습이다. 프랑스 니스의 누드비치는 의무적으로 알몸이 돼야 하지만, 이곳에서 알몸 여부는 개인의 선택이다. ⓒ이석원 알프스에서 발원한 이자르 강은 빙하가 녹아 내린 물인 탓에 늘 에머랄드빛이 신비롭다. 하지만 영국 정원 내 이자르강변에서 더 신비로운 것은 아무런 꺼리낌없이 알몸으로 일광역을 즐기는 뮌헨 시민들의 모습이다. 프랑스 니스의 누드비치는 의무적으로 알몸이 돼야 하지만, 이곳에서 알몸 여부는 개인의 선택이다. ⓒ이석원

1790년에 조성된 영국 정원은 워낙 넓기 때문에 다양한 공간을 품고 있다. 이자르 강 줄기를 따라 펼쳐진 강 둔덕은 뮌헨 시민들이 최고의 자유로운 모습으로 일광욕을 즐기는 공간이다. 겨울이 아닌 다음에는 내리쬐는 햇볕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온몸으로 받아내려는 듯 그들은 망설임 없이 옷을 훌훌 벗어던진다. 가장 기본적인 수영복만을 걸치는 것도 번거롭다는 듯 아예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벗어던진 이들은 남의 시선이나 특별한 눈빛 따위는 염두에 두지도 않는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이야 옷을 입었든 말았든, 그 사람이 뮌헨 시민이든 여행자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하느님이 처음 인간에게 준 모습 그대로로 위대한 자연을 만끽한다. 다만 경솔한 여행자가 생각 없이 들이대는 카메라만은 곱지 않게 본다.

영국 정원 안 중국탑 부근에는 한꺼번에 몇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지 가늠이 안되는 넓고 멋진 비어가르텐이 있다. 뮌헨 시민이라면 당당히 1리터짜리 생맥주잔을 들고 거침없는 건배를 외친다. 물에 석회질 성분이 많은 독일에서는 어린이조차도 물 대신 맥주를 마시는데, 비어가르텐 마다 온 가족이 맥주를 즐기는 모습을 보는 것은 흔하다. 물론 어린이들이 마시는 맥주는 도수가 1도 미만이라 맥주라고 하기에도 민망하지만, 맹물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영국인이면서 미국에서 태어나 바이에른의 장군이자 사회개혁가로 활동했던 물리학자 그라프 룸포드(영국명 벤자민 톰프슨)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영국 정원은 더할 나위 없이 멋진 휴식의 공간임에 분명하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 운동을 하는 사람, 그저 천천히 걷는 사람을 비롯해 심지어 한켠에서는 좁은 수로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이용해 서핑을 즐기는 사람까지 있다. 뮌헨 사람들은 “영국 정원이 있어 뮌헨은 더욱 여유롭다”고 얘기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사실 뮌헨이라는 도시보다 먼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유명해진 곳은 슈바빙(Schwabing)이다. 뮌헨 대학교 부근 레오폴드 거리 일대를 일컫는 슈바빙은 우리의 대학로 정도 되는 젊음의 거리. 그런 슈바빙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1955년인가 1956년 무렵이다.

레오폴드 거리를 중심으로 뮌헨대학교 일대에 형성된 슈바빙은 우리로 따지면 대학로 격이다. 말 그대로 뮌헨의 지성과 열정이 가장 뜨겁게 일어나는 공간. 사실 우리에게는 전혜린으로 인해 뮌헨보다도 슈바빙이 더 일찍 유명해지기도 했다. ⓒ이석원 레오폴드 거리를 중심으로 뮌헨대학교 일대에 형성된 슈바빙은 우리로 따지면 대학로 격이다. 말 그대로 뮌헨의 지성과 열정이 가장 뜨겁게 일어나는 공간. 사실 우리에게는 전혜린으로 인해 뮌헨보다도 슈바빙이 더 일찍 유명해지기도 했다. ⓒ이석원

독일 뮌헨 대학교에서 유학하던 한 한국인 여학생이 당시 한국일보에 글 하나를 보낸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전쟁의 상흔에서 헤어나지도 못하던 사람들에게 독일이니 뮌헨이니 하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마는 당시 서울 명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김승옥 김수영 이호철 그리고 박인환 천상병 이중섭 등의 문인과 화가들은 뮌헨발 짤막한 글에 정신을 뺏겼다. 그리고 그 글을 쓴 어린 여학생에게 주목했다.

전혜린. 시인 정공채가 “불꽃처럼 사랑하며, 사랑하다 죽었다”고 얘기한, 1960년대 ‘1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한 천재’라는 수식어 붙이기에 망설임이 없었던 수필가이자 번역가. 그녀로 인해 독일 문학에 목말라 하던 한국의 문학 지망생들은 비로소 헤르만 헤세, 하일리히 뵐, 에리히 케스트너, 루이제 린저를 제대로 접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슈바빙이라는 낯선 단어를 알기 시작했다.

슈바빙은 대학 주변이라는 점 때문에 신선하고 참신하지만 격이 높은 문화와 예술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늘 거리에는 헌 책을 가지고 나와서 파는 학생들, 초상화를 그려주고 용존을 버는 화가 지망생들로 붐빈다. ⓒ이석원 슈바빙은 대학 주변이라는 점 때문에 신선하고 참신하지만 격이 높은 문화와 예술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늘 거리에는 헌 책을 가지고 나와서 파는 학생들, 초상화를 그려주고 용존을 버는 화가 지망생들로 붐빈다. ⓒ이석원

어느새 슈바빙의 상징물이 돼 버린 워킹맨 ⓒ이석원 어느새 슈바빙의 상징물이 돼 버린 워킹맨 ⓒ이석원

요즘이야 슈바빙과 전혜린을 연결하는 여행자가 흔치는 않겠지만, 한 때 문학을 흠모하던 한국의 거의 대부분 여성들이 전혜린의 흔적을 찾아 뮌헨의 슈바빙을 찾았다고 하니, 그런 의미에서 슈바빙은 단지 독일 대학생들의 공간 이상의 의미를 지녔으리라.

그런데 뮌헨은 현재 독일 뿐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잘 사는 도시, 인구 100만 이상의 대도시 중 자연환경이 가장 쾌적한 도시라는 행복한 이름을 가지기 전 가장 참혹한 세계 현대사의 시발점이 된 곳이기도 하다. 아돌프 히틀러, 역사의 단죄를 받지 않고 죽어버린 최악의 독재자의 정치가 시작한 곳이 뮌헨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괴닉스 광장에 남아 있는 1930년대 나치 당사 건물은 네거티브 역사의 흔적으로 뮌헨 시민들의 각성제 역할을 한다. 특히 1938년 11월 19일 괴닉스 광장에서 열린 징집병 선서식은 2차 세계 대전의 사실상 시발점이 됐다.

다하우 강제수용소 정문에는 'Arbeit macht frei.(노동만이 자유를 준다.)'는 말이 써 있다. 하지만 이 노동은 우리가 숭고하게 생각하는 그 노동은 아닐 것이다. ⓒ이석원 다하우 강제수용소 정문에는 'Arbeit macht frei.(노동만이 자유를 준다.)'는 말이 써 있다. 하지만 이 노동은 우리가 숭고하게 생각하는 그 노동은 아닐 것이다. ⓒ이석원

다하우 수용소는 대표적인 네거티브 역사 유산으로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이 얼마나 참혹한 전쟁을 벌였는지, 독일인 스스로의 반성 속에 유지 보존되고 있다. ⓒ이석원 다하우 수용소는 대표적인 네거티브 역사 유산으로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이 얼마나 참혹한 전쟁을 벌였는지, 독일인 스스로의 반성 속에 유지 보존되고 있다. ⓒ이석원

그리고 뮌헨의 북서쪽 끄트머리에 있는 다하우 강제 수용소(Dachau). 이곳은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 보다 먼저, 그리고 전쟁 당시 그 어떤 수용소보다 더 참혹한 유대인에 대한 홀로코스트가 자행된 최초의 수용소다. 가스실에서부터 시신 화장장까지 머리카락 하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세상에서 존재를 지워버리는 비인간의 공간. 그런데 가해 당사자이면서도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그 참혹한 역사를 그대로 보존하고, 또 오늘날의 교훈으로 삼는 독일인들에게는 존경심과 더불어 경외감까지 들게 한다.

호프브로이하우스와 뢰벤브로이, 옥도버페스트와 흰 소시지 바이스 부스트로 대변되는 맥주의 도시 뮌헨. 화려한 궁전 문화와 중세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저질렀던 현대사의 참혹한 전쟁 범죄에 대해 기꺼이 사죄하고 반성의 역사를 이어가는 그들을 만나는 시간은 충분히 행복하고 산뜻한 기억이다.

글/이석원 여행작가·기자

이석원 기자 (galamoi@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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