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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의 짙푸른 정원에서 모차르트를 외치다

이석원 기자 (galamoi@dailian.co.kr)
입력 2014.07.12 08:51 수정 2014.07.12 09:01

<유럽에 미치다⑮-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사운드 오브 뮤직'의 야외무덤을 보니...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중부 유럽의 지도. 구글맵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중부 유럽의 지도. 구글맵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고향, 소금 하나로 유럽 최고의 부자가 된 도시, 북쪽의 로마, 유럽의 심장, 아름다운 선율로 움직이는 도시, ‘사운드 오브 뮤직’의 원전, 알프스의 푸른 정원...이 수많은 수식어는 하나의 도시를 가리킨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Salzburg). 겨우 15만의 인구를 가진 도시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가 된 잘츠부르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다. 알프스의 북쪽 끝자락이라는 자연환경 외에도 1년 내내 도시의 골목골목을 휘감는 모차르트의 선율, 잘차흐 강의 에머랄드빛 푸름의 넘실거림, 18세기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아름다운 건축물의 향연,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 축제의 뜨거움, 이 모든 것이 있는 잘츠부르크는 비록 그곳에 살지 않아도, 잠시 스쳐지나갈지라도 충분한 축복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잘츠부르크의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서기 700년 경 교황청의 로마 관구로 주교청이 설치되면서 본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했으니 1300년이 넘었다. 하지만 잘츠부르크가 오스트리아의 역사가 된 것은 200년 남짓. 1803년 합스부르크 왕조에 의해 오스트리아로 편입되기 전까지 이 곳은 로마의 교회령으로 대주교가 다스리던 곳이다.

잘츠부르크 주요 지점. 구글맵 잘츠부르크 주요 지점. 구글맵

인근 잘츠감머구트(Salzkammergut)의 암염 광산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소금이 유럽 전역아로 수출되면서 유럽 최고의 부자 도시가 되기도 했던 잘츠부르크는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이 곳을 다스렸던 볼프디트리히 대주교 시절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유럽 최강의 합스부르크 왕조도 부럽지 않은 부와 문화적 융성을 누린 잘츠부르크는 지척에 있는 바이에른 공국의 위협 때문에 도시의 요새화까지 이루면서 난공불락 철옹성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빈(Wien)에서 기차를 타고 잘츠부르크로 가는 여정은, 이웃한 독일 남부 바이에른 지방의 주도 뮌헨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멀다. 빈에서 300km 떨어진 반면 뮌헨에서는 150km 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빈의 서부역(Westbahnhof)에서 이른 아침 기차를 타고 3시간 30분 동안 오스트리아의 전원을 감상하다가 도착한 잘츠부르크 중앙역은 도시의 명성과는 달리 한적하고 호젓했다.

게다가 세계 최고 최대를 자랑하는 음악축제인 ‘잘츠부르크 음악제’가 막 끝난 시점이라 축제 뒤의 도시는 다소 썰렁하기까지 했다. 지난 두 달간 이 작은 도시로 전 세계 고전음악 마니아들이 몰려 왔던 게 사실일까? 모든 거리에서, 조그마한 공간이라도 있으면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의 현악 삼중주가 울려퍼지고, 심지어는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까지 거리로 들고 나와 모차르트의 세레나데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Eine Kleine Nachtmusik)를 연주하던 곳, 하지만 내가 잘츠부르크에 도착했을 때 그런 분주함과 요란함, 그리고 감격스런 함성은 간데없고 그저 낯선 여행자들과 한가한 주민들이 별다른 갈등 없이 일상을 즐기고 있었다.

잘츠부르크 중앙역에서 보이는 호엔잘츠부르크성의 모습. ⓒ이석원 잘츠부르크 중앙역에서 보이는 호엔잘츠부르크성의 모습. ⓒ이석원

잘츠부르크는 알프스에서부터 흘러내려온 잘차흐 강이 도시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며 갈라놓은 양안에 형성된 도시다. 강의 서쪽이 구시가지이고 동쪽은 신시가지. 그러나 굳이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뉘는 의미가 별로 없다. 신사가지라고 해도 대부분의 건물들은 바로크 시대의 건축물들로 고풍스럽고, 거리도 트램과 자동차로 복잡하긴 하지만 여행자가 걷기에 안성맞춤이 편안함이 그대로 남아 있다.

잘츠부르크에서의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다는 조급함 탓에 역에서부터 서둘러 길을 물어 잘차흐 강 남쪽 구시가지로 몸을 움직인다. 그런데 중앙역에서 조금 몸을 틀자 건물들 사이, 트램의 전선이 얽힌 너머 먼 풍경에 호엔잘츠부르크성((Festung Hohensalzburg)이 보인다. 마치 예쁜 케이크 위에 장식된 장난감 과자처럼 언덕 위에 얹혀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탓에 시내 어디를 돌아다녀도 호엔잘츠부르크성은 늘 시야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다.

잘츠부르크의 젖줄인 잘차흐 강. ⓒ이석원 잘츠부르크의 젖줄인 잘차흐 강. ⓒ이석원

잘츠부르크에서의 첫 여정은 모차르트가 세례를 받은, 그리고 모차르트의 오르간 연주를 라이브로 들을 수 있었던 구시가지의 중심 대성당이다. 하지만 아무리 급한 마음이라도 발걸음을 꼭 붙잡는 것이 있으니 바로 잘차흐(Salzach) 강이다. 언젠가 친구가 이 곳에서 한 달 정도 머물렀을 때 매일 아침 잘차흐 강변에서 조깅했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대학에서 유학하던 후배는 매일 해질 무렵 잘차흐 강변을 산책하며 석양을 즐겼다고 한다. 그들 모두 공통적으로 애기하던 것은, 이 잘차흐 강은 잘츠부르크보다 더 강하게 사람을 당기고 놓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경험은 무서운 것, 한 여름 한국에서 참혹하게 목격했던 어떤 강들의 녹조 현상 때문이었을까? 잘차흐 강의 희한한 물빛이 녹조 현상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가 알프스에서부터 흘러내려온 빙하에서 녹은 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혼자 계면쩍어 했다. 오묘하고 신비로운 에머럴드빛 강물은 잘츠부르크가 왜 알프스의 짙푸른 정원이라고 불리는지 알게 해준다. 그래서 신시가지에서 구시가지로 넘어가는 스타츠브뤼케 다리 위에서 한참 동안을 넋 놓고 서 있는 사람이 비단 나 뿐만은 아니었다.

잘츠부르크 신앙의 중심이며 정신적인 위로처로 여겨지는 대성당. ⓒ이석원 잘츠부르크 신앙의 중심이며 정신적인 위로처로 여겨지는 대성당. ⓒ이석원

대성당의 미사 장면은 엄숙하고 경건하다. 잘츠부르크 대주교가 미사를 집전하는 모습이다. ⓒ이석원 대성당의 미사 장면은 엄숙하고 경건하다. 잘츠부르크 대주교가 미사를 집전하는 모습이다. ⓒ이석원

다시 발걸음을 재촉해 대성당으로 향하는 이유는, 모차르트의 향기를 느끼며 오스트리아식 미사를 경험하기 위해서였다. 좌우에 뭐가 있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서둘러 겨우 미사 시간에 맞춰 들어선 대성당 입구는 가히 압도적이다.

대성당의 현재 모습은 13세기 후반에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원래 744년 잘츠부르크가 교회령 주교청이 된 직후 세워진 대성당은 바실리카 양식이었다. 그러나 지진과 전쟁으로 소실되고 다시 지어지면서 외형은 다소 단조롭고 소박한 느낌이다. 그러나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화려한 조각과 스터코(Stucco. 치장벽토) 기법의 회화, 그리고 돔으로부터 내리비치는 강렬한 태양빛을 받은 벽들로 인해 순간 주눅이 들 지경이다. 게다가 제대 왼쪽에 놓인 2개의 파이프오르간을 거쳐 성당 뒤 중앙에 놓인 대형 오르간에 시선이 멈춰지면 숨이 탁 막힌다. 모두 6000개의 파이프를 가지고 있는 이 오르간에는 모차르트의 체취가 그대로 담겨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 레오폴드를 따라 대성당에 온 모차르트는 바로 이 파이프오르간으로 연주했고, 그의 연주는 대주교의 강론보다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을 더 감동시켰다.

대성당의 천정과 벽은 스터코 기법의 회화가 주를 이룬다. ⓒ이석원 대성당의 천정과 벽은 스터코 기법의 회화가 주를 이룬다. ⓒ이석원

18세기 모차르트는 바로 저 자리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다. ⓒ이석원 18세기 모차르트는 바로 저 자리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다. ⓒ이석원

대축일이나 잘츠부르크 음악제 때는 가장 큰 파이프오르간에서 연주가 이뤄진다. ⓒ이석원 대축일이나 잘츠부르크 음악제 때는 가장 큰 파이프오르간에서 연주가 이뤄진다. ⓒ이석원

대성당 돔의 내부. 자연채광으로 성당 안을 충분히 밝게 비춘다. ⓒ이석원 대성당 돔의 내부. 자연채광으로 성당 안을 충분히 밝게 비춘다. ⓒ이석원

어떻게 무슨 정신으로 미사에 참례했는지 깨닫기도 전 미사를 마친 사람들은 그제사 제대로 성당의 이곳저곳을 보느라 여념이 없다. 전 인구의 95%가 가톨릭 신자라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오히려 이탈리아 로마 사람들보다 신앙심이 더 강하기로 유명하다. 특히 잘츠부르크는 과거 대주교가 다스리던 땅이어서 그런지 더 그렇다. 그래서일까? 단지 구경을 위해 성당을 찾은 여행자들마저도 경건한 신심에 빠져드는 기분이라는 표정들이다. 수많은 여행객들이 성당을 둘러보지만 어느 누구도 높은 소리를 내거나, 성가시게 떠드는 법이 없다.

홀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 그러나 초라해보이는 저 연주자는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대학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석원 홀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 그러나 초라해보이는 저 연주자는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대학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석원

광장에서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들은 각양각색의 악기를 들고 나오지만 그들이 연주하는 것은 오로지 모차르트 뿐이다. ⓒ이석원 광장에서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들은 각양각색의 악기를 들고 나오지만 그들이 연주하는 것은 오로지 모차르트 뿐이다. ⓒ이석원

클래식의 고장 잘츠부르크에서 현대적인 포크 기타를 연주하는 노인의 모습도 이채롭다. ⓒ이석원 클래식의 고장 잘츠부르크에서 현대적인 포크 기타를 연주하는 노인의 모습도 이채롭다. ⓒ이석원

성당 앞 돔 광장((Domplatz)과 성당 옆 레지덴츠 광장(Residenzplstz)은 잘츠부르크 거리 예술의 천국이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할 것 없이 늘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현악삼중주를 하는 이들, 피아노 독주를 하는 이들, 플룻이나 오보에를 들고 나와 연주하는 이들, 게다가 기타나 만도린, 마림바 등 비교적 현대적인 느낌의 악기를 연주하는 이들도 많은데, 그래도 한결같이 그들이 연주하는 것은 모차르트다. 모차르트가 단 한 곡 남긴 클라리넷 협주곡을 연주하던 한 클라리네스트가 이 곡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여주인공 메릴 스트립을 빼닮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발걸음을 옮긴 곳은 성 페터 교회(Stiftskirche Sankt Peter).

그런데 이곳은 교회라기보다 묘지다. 교회 마당에는 온갖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는 지상 묘지이고, 건물 안은 지하묘지, 즉 카타콤베다. 묘지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보면 묘지로 보이지 않는 이 곳에는 모차르트의 누이인 마리안네와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이 묻혀있다.

1130년에 처음 지어진 성 페터 교회는 원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800년 동안 증개축을 거듭하면서 바로크 양식으로 변했다. ⓒ이석원 1130년에 처음 지어진 성 페터 교회는 원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800년 동안 증개축을 거듭하면서 바로크 양식으로 변했다. ⓒ이석원

묘지인지 정원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성 페터 교회의 묘지. 저 철창 안 묘지에 '사운드 오브 뮤직' 트랩 가족이 숨어있었다. ⓒ이석원 묘지인지 정원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성 페터 교회의 묘지. 저 철창 안 묘지에 '사운드 오브 뮤직' 트랩 가족이 숨어있었다. ⓒ이석원

성 페터 교회의 묘지는 잘츠부르크 시민들에게 휴식의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이석원 성 페터 교회의 묘지는 잘츠부르크 시민들에게 휴식의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이석원

그런데 이 야외의 묘지들, 어딘지 눈에 익다.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도 등장하는 곳이다. 영화 후반부 나치의 눈을 피해 스위스로 도망을 치려던 트랩 대령과 마리아가 아이들과 함께 숨어 있던 곳. 그래서 눈에 익었던 것이다.

잘츠부르크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단 한 번도 시선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곳,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어 도시를 굽어보며 지키는 파수대와도 같은 곳, 호엔잘츠부르크성에 오르는 방법은 2가지다. 성 페터 교회를 나와 왼쪽 오르막길을 천천히 걸어가는 방법과, 그 오르막길이 시작하는 지점에 있는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방법. 많은 사람들은 올라갈 때는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올 때는 걷는 방법을 선택한다.

호엔잘츠부르크성을 걸어서 올라가는 길. 길 양편에는 오스트리아 전통 돼지고기 튀김음식인 슈니첼을 비롯해 다양한 식당과 카페들이 늘어서 있다. ⓒ이석원 호엔잘츠부르크성을 걸어서 올라가는 길. 길 양편에는 오스트리아 전통 돼지고기 튀김음식인 슈니첼을 비롯해 다양한 식당과 카페들이 늘어서 있다. ⓒ이석원

호엔잘츠부르크성으로 오르는 케이블카 선로. 1892년 처음으로 설치됐다. ⓒ이석원 호엔잘츠부르크성으로 오르는 케이블카 선로. 1892년 처음으로 설치됐다. ⓒ이석원

호엔잘츠부르크성을 오르는 케이블카는 이탈리아 나폴리의 푸니쿨라레를 많이 닮았다. 아니 거의 흡사하다. 또한 규모는 조금 작아도 우리나라 전남 해남에 있는 모노레일과도 비슷한 면이 있다.

케이블카가 도착한 곳은 호엔잘츠부르크성의 담벼락 바로 아래. 잘츠부르크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진 잘츠부르크는 아래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아름답다. 도시를 관통하는 잘차흐 강을 중심으로 양편으로 나뉜 잘츠부르크의 지붕들은 하나도 똑같은 모양들이 없으면서도 잘 정돈됐다. 너무 크고 웅장한 건물도 드물지만 고만고만한 건물들이 어떻게 저런 조화를 이루면서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알프스의 자락을 따라 내려와 평평한 도시를 이룬 이 곳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손이 닿은 곳에서 극대화된 아름다움을 과시한다. 그런 것을 보면 자연 그대로보다 인간의 손길이 스치고 지나간 것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며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핑 돌기까지 한다.

호엔잘츠부르크성에서 본 잘츠부르크 시내. 피렌체의 붉은 지붕처럼 선명한 원색은 아니어도 소박한 채색이 오히려 더 감동스럽다. ⓒ이석원 호엔잘츠부르크성에서 본 잘츠부르크 시내. 피렌체의 붉은 지붕처럼 선명한 원색은 아니어도 소박한 채색이 오히려 더 감동스럽다. ⓒ이석원

호엔잘츠부르크성은 1077년 게브하르트 대주교가 바이에른 공국을 비롯한 남부 독일 제후들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세운 요새 같은 성이다. 세계 1, 2차 대전을 거치면서도 파괴되지 않고 남은 중부 유럽 최대 규모의 성인데, 궁전의 의미보다는 요새의 의미가 강했기 때문에 겉으로 보면 상당히 단단하고 강인해 보인다. 그래서 건축학적 미보다는 기능이 한층 강조된 이미지. 그러나 내부는 겉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다. 외적이 침입하더라도 복잡한 구조 때문에 우왕좌왕 하다가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구조. 위 아래층으로 얽히고 섥힌 복도와 계단은 여행자까지도 곤혹스럽게 만든다.

이 곳에도 모차르트의 흔적은 있다. 성 안 의식홀과 황금홀은 모차르트가 어린 시절 대주교와 잘츠부르크의 귀족들 앞에서 연주를 하던 곳이다. 창밖으로 잘츠부르크 시내의 전경을 내려다보며 모차르트의 신기에 가까운 연주를 듣던 대주교와 귀족들의 행복한 탄성이 아직도 홀 내부에 울려퍼지는 느낌이 든다.

어린 모차르트가 대주교와 귀족들 앞에서 연주하며 감동을 주던 황금홀. 지금도 이 곳에서는 실제 연주가 이뤄지고 있다. ⓒ이석원 어린 모차르트가 대주교와 귀족들 앞에서 연주하며 감동을 주던 황금홀. 지금도 이 곳에서는 실제 연주가 이뤄지고 있다. ⓒ이석원

그런데 유럽 최고의 부유함을 자랑하던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성 안에는 귀한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철옹성 같던 이 성을 점령한 유일한 인물이었던 나폴레옹. 그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침범을 허락하지 않았던 호엔잘츠부르크성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이곳에 있는 대주교의 보물들을 몽땅 프랑스로 약탈해 갔다. 다만 사기로 화려하고 아름답게 치장한 벽난로 하나가 덩그마니 남았는데, 3.5톤에 이르는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서 가져가는 것을 포기했던 것이다.

가는 곳마다 모차르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이 도시에서 진짜 모차르트를 느낄 수 있는 곳은 게트라이데 거리(Getreidegasse).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번화한 상점의 거리 한 가운데 노란 색의 건물 하나가 있다. 모차르트가 나고 자란 곳, 생가(Mozart Geburtshaus)다.

게트라이데 거리 9번지의 모차르트 생가. 잘츠부르크에서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공간이다. ⓒ이석원 게트라이데 거리 9번지의 모차르트 생가. 잘츠부르크에서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공간이다. ⓒ이석원

모차르트의 생가는 현재 모차르트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석원 모차르트의 생가는 현재 모차르트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석원

모차르트 생가 1층에 전시된 어린 시절 모차르트의 초상화. 그가 6살이던 1762년 합스부르크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연주를 한 후 그는 초상화 속의 옷을 여제로부터 선물받았다. ⓒ이석원 모차르트 생가 1층에 전시된 어린 시절 모차르트의 초상화. 그가 6살이던 1762년 합스부르크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연주를 한 후 그는 초상화 속의 옷을 여제로부터 선물받았다. ⓒ이석원

게트라이데 거리 9번지의 이 건물에서 1756년 1월 17일 모차르트가 태어났다. 그리고 17살까지 여기서 살면서 상당히 많은 곡들을 썼다. 그래서 지금은 모차르트 박물관으로 꾸며졌는데, 빈과 잘츠부르크를 통틀어 모차르트와 관련된 자료들이 가장 많이 전시돼 있다. 총 4층으로 된 공간 중 1층에는 모차르트가 유년시절부터 청년시절까지 사용하던 바이올린과 피아노 등 악기가 전시돼 있다. 또 모차르트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볼 수 있는 초상화와 어린 시절 작곡한 음악들의 원본 악보가 전시돼 있다. 그리고 2층에는 그의 오페라와 관련된 자료, 3층과 4층에는 그와 가족들이 살았던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번화한 게트라이데 거리. 이 도시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결국 이 곳에서 다 만난다는 말이 있다. ⓒ이석원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번화한 게트라이데 거리. 이 도시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결국 이 곳에서 다 만난다는 말이 있다. ⓒ이석원

잘츠부르크의 또 다른 매력은 게트라이데 거리에 있는 간판들이다. 모든 상점에 걸려있는 간판은 글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상점이 어떤 물건을 취급하고 있는지를 알게끔 해준다. 그런데 단지 정보 전달의 역할 뿐 아니라 금속 공예의 아름다움까지도 담고 있다. 단 하나도 같은 모양이 없고, 외국에서 온 브랜드마저도 같은 양식의 간판을 달아야만 매장을 열 수 있는 곳. 서울 인사동에 매장을 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해당국 문자로 간판을 단 ‘스타벅스’가 생각난다.

게트라이데 거리의 간판들은 금속 공예품으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 ⓒ이석원 게트라이데 거리의 간판들은 금속 공예품으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 ⓒ이석원

그런데 게트라이데 거리의 모든 간판들은 한 사람의 장인에게서 탄생한다. 그 장인은 새로운 간판의 제작은 물론 기존 간판의 보수까지도 담당한다. ⓒ이석원 그런데 게트라이데 거리의 모든 간판들은 한 사람의 장인에게서 탄생한다. 그 장인은 새로운 간판의 제작은 물론 기존 간판의 보수까지도 담당한다. ⓒ이석원

이 거리는 늘 사람들로 붐빈다. 그 사람들은 갈 양편 상점들의 손님이기도 하고, 그저 길 위의 풍경을 즐기는 여행자이기도 하다. 모차르트를 동경해 이 곳을 걸으면 모차르트를 만날까봐 가슴 두근거리는 사람도 있고, 지나치게 상품화 돼 여기저기서 팔리고 있는 모차르트의 다양한 모습에 가슴 아파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게트라이데 거리의 간판 앞에서는 나지막한 탄성을 지른다. 이 거리에서 만난 한 한국인 대학생 여행자는 “잘츠부르크에 와서 단 한번 모차르트를 잊은 적이 있는데, 게트라이데 거리의 간판을 보다가 그랬다”고 한다.

잘츠부르크에서 마지막 여정은 미라벨 정원(Mirabell Garten)이다. 이 정원은 1606년 당시 잘츠부르크의 지배자였던 볼프 디트리히 대주교가 사랑하는 여인 살로메를 위해 바로크 양식의 미라벨 궁전을 짓고난 후 1690년 바로크 건축의 대가인 요한 피셔 폰 에를라흐가 조성한 것. 규모는 작지만 유럽 정원 문화의 최고작으로 정평이 나 있다. 잘츠부르크를 짧게 여행하는 사람들은 마라벨 궁전은 생략하더라도 마라벨 정원은 반드시 보고 가는데, 잘츠부르크 시민들에게 뿐 아니라 여행자들에게도 편안한 휴식의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대주교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바치기 위해 만든 미라벨 궁전. 이 곳 '대리석의 방'에서도 모차르트의 연주가 종종 열리곤 했다. ⓒ이석원 대주교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바치기 위해 만든 미라벨 궁전. 이 곳 '대리석의 방'에서도 모차르트의 연주가 종종 열리곤 했다. ⓒ이석원

그런데 미라벨 정원 또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더욱 유명해진 곳. 여주인공 마리아와 트랩 대령의 아이들이 그 유명한 ‘도레미송’을 부른 곳이다. ‘도레미송’은 호엔잘츠부르크성의 성벽 계단에서 시작해 마라벨 정원의 계단에서 끝난다. 그러면서 정원의 꽃밭과 분수대, 장미의 터널을 뛰어다니며 미라벨 정원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낸다. 즉,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로 인해 유명해졌지만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인해 그 절정을 이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라벨 정원은 유럽 궁전 정원 문화의 절정이라고 불린다. ⓒ이석원 미라벨 정원은 유럽 궁전 정원 문화의 절정이라고 불린다. ⓒ이석원

과거에는 일반 시민에게 개방되지 않던 공간이었던 미라벨 정원. 지금은 잘츠부르크 시민들의 가장 편안한 휴식처이다. ⓒ이석원 과거에는 일반 시민에게 개방되지 않던 공간이었던 미라벨 정원. 지금은 잘츠부르크 시민들의 가장 편안한 휴식처이다. ⓒ이석원

아인슈타인은 “죽음이란 더 이상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한 음악평론가는 “베토벤의 음악이 하늘을 울리는 것이라면 모차르트는 하늘이 내린 음악”이라고도 했다. 잘츠부르크가 낳은 또 다른 위대한 음악가인 세계적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세상에 위대한 음악가는 많지만 모차르트는 단 한 사람”이라고 했다.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혹자들은 잘츠부르크의 지나친 ‘모차르트 상업화’에 대해 비난을 퍼붓는다. 모차르트가 살아있을 때 그에게 전혀 신경도 쓰지 않던 도시가, 모차르트가 비참하게 죽어갈 때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던 도시가 모차르트가 태어난 지 200년이 지나서야 그를 숭상하듯 팔아먹고 있다는 것이다.

잘츠부르크의 시계는 천천히 돈다. 풍성한 문화적 부와 함께 그들은 시간마저도 풍요로운 것이다. 그래서 잘츠부르크를 찾는 여행객들도 잘츠부르크의 시간대로 움직일 수 있다. ⓒ이석원 잘츠부르크의 시계는 천천히 돈다. 풍성한 문화적 부와 함께 그들은 시간마저도 풍요로운 것이다. 그래서 잘츠부르크를 찾는 여행객들도 잘츠부르크의 시간대로 움직일 수 있다. ⓒ이석원

그런 비판도 일견 일리가 있다. 체 게바라의 혁명정신보다는 티셔츠에 그려진 잘생긴 반항아적 이미지가 현대의 젊은이들을 열광시키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츠부르크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 도시로 인해 세상 사람들은 모차르트를 좀 더 친밀하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클래식 음악에 문외한이고 심지어는 알러지 반응까지 일으키던 사람조차도 이 도시가 머금고 있는 아름다운 바로크의 풍미와 모차르트가 환상적으로 어우러져 알러지조차 잊고 모차르트를 듣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잘츠부르크는 알프스의 짙푸른 정원이라고도 불린다. 그것은 이 도시가 단지 모차르트의 위대함만을 내뱉고 사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다만 그 아름다운 자연과 찬란한 바로크 건축 에술, 거기에 또 다시 나오기 어려운 위대한 천재 음악가가 그윽한 선율을 얹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도시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게 바로 잘츠부르크다.

이석원 여행작가 / 기자

이석원 기자 (galamoi@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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