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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그날, 춘천에선 기적이 있었다

김소정 기자
입력 2013.06.25 10:36 수정 2013.06.25 21:20

흔한 전쟁사진 한 장 없는 춘천지역전투, 순수 국군의 첫승

3일간 10분의 1 전력으로 북한군 막아 낙동강 방어선 가능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이 38선을 넘으면서 전쟁은 시작됐다. 수도 서울을 함락시킬 계획을 세운 북한군은 춘천을 거쳐 48시간만에 수원을 점령하는 것으로 노선을 잡았다.

북한군은 122㎜ 곡사포에 37㎜와 76.2㎜ 대전차포, SU-76 자주포까지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에 맞선 국군은 105㎜ 야포만 겨우 갖춘 소총중대였다. 그것도 최전방엔 소총부대가 앞장섰다.

하지만 북한군은 춘천에서 의외로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만 했다.

북한은 애초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38선을 뚫은 뒤 홍천을 거쳐 48시간 내 수원을 점령하면서 수도 서울에 입성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국군은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전쟁을 맞아 육탄전을 불사하며 3일간 춘천지역을 사수했다.

이 틈에 우리 군은 어느 정도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벌었고, 낙동강방어선까지 구축할 수가 있었다. 또 춘천 6사단이 북한군을 막고 있을 그때 유엔군 지원이 결정됐으며, 곧바로 맥아더 사령관이 비행기로 날아와 수원비행장에 내릴 수 있었다.

이후 춘천지역 방어부대였던 6사단은 낙동강방어선까지 밀려 내려갔다가 다시 북으로 진격했을 때에도 가장 처음으로 압록강에 태극기를 꽂았다.

춘천지구전투는 6.25전쟁 첫날에 시작돼 3일만에 국군에게 첫 승리를 안겨준 전투였지만 그 흔한 전쟁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다. 전쟁을 기록하던 유엔군이 투입되기 이전에 순수하게 우리 국군의 전력만으로 치른 전쟁이기 때문이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후 춘천지역 전투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쟁 초기 우리 국군의 활약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사진은 눈빛출판사에서 출간한 '한국전쟁통신'에 수록된 사진) ⓒ 연합뉴스

6.25전쟁 중에 국군이 승리를 거둔 전투로 인천상륙작전이나 낙동강전투가 꼽혀왔지만 춘천지구전투가 알려진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유엔군이 가담하기 직전에 치러진 전투인 탓에 남아 있는 자료나 사진이 많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참전용사들의 전언이 이어지고 학술연구가 뒷받침되면서 몇해 전부터 춘천지구전투가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춘천지구전투는 병력과 화력 모두 열세인 국군이 북한군을 맞아 첫 승리를 거둔 전투로서 의미가 크다.

북한은 춘천지구전투에서 의외로 고전을 겪자 곡사포, 대전차포에 SU-76 자주포까지 동원해 인해전술을 폈다.

국방부 기록에 따르면, 당시 춘천과 홍천지역 방어부대였던 6사단은 예비역까지 포함해 7300여명이었다. 반면, 춘천시 북산면 38선을 넘은 북한군 2군단은 3만6000여명이었다. 병력에서만 북한이 5배에 달했다.

여기에 당시 북한은 122㎜ 곡사포 22문에 37㎜ 대전차포 12정, 76.2㎜ 대포 70여문이 있었고 당시 참전용사들이 전차로 오해했던 SU-76 자주포도 8문이나 갖췄다. 우리는 주력이 105㎜ 야포 15문에 박격포 90여문, 대전차포 12정이었으니 화력에서도 북한이 10배나 앞섰다.

하지만 춘천지구전투 결과 북한군은 6800여명 사상했고, 국군은 360여명 사상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연히 국군의 압승이었다.

압승을 거둔 6사단장이 3일만에 육군 본부에 연결된 통신으로 승전 소식을 알렸지만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다른 전선이 다 남쪽으로 밀려 있으니 6사단만 고립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방부 관계자는 “북한군이 서해 동해 할 것 없이 38선을 일제히 넘어 3일만에 서울을 함락시켰는데도 당시 서울 북쪽에 머무르던 김일성이 곧바로 내려오지 못한 것은 춘천을 통해 수원을 손아귀에 넣고 서울을 포위하려던 작전이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많은 학자들은 해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원래 북한군의 전쟁 계획은 서부전선으로 서울을 압박하면서 우회적으로 춘천에 이어 수원을 48시간 내에 점령하는게 목표였다. 수원의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해서 한국군을 궤멸시켜서 전쟁을 한번에 끝내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작전이 성공하지 못하자 당시 김일성은 서울 북부지역을 떠나지 못하고 춘천지역전투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2군단장을 압박했다. 포병으로 전선이 뚫리지 않자 북한군은 전쟁 이틀째인 26일부터 탱크 궤도를 갖춘 자주포 여러 대를 앞세워 마치 인해전술을 펼치듯 병력을 대거 투입했다.

북한군의 자주포에 우리 야포를 쏘아봤자 바위에 계란치기 식이었다. 이러니 국군은 급기야 육탄전을 불사했다. 심일 소령이 부하대원들을 데리고 북한군 자주포에 뛰어올라 해치를 열고 화염병과 수류탄을 던져 넣으면서 2대를 연이어 폭파시키는 위력을 보였다. 국군의 기세는 다시 올라갔다.

처음 소양강 북부지역에서 전쟁을 치르던 국군은 전략적으로 뒤로 물러나서 한강방어선과 같은 소양강방어망을 구축하기로 했다. 부대가 이동하려다보니 야포들은 차에 묶어서 견인하면 되는데 5000발에 달하는 포탄을 단숨에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자 피난짐을 싸던 주민들이 전쟁에 대거 참여했다. 당시 중학교 4~6학년 학생들과 청년단이 참여해 포탄 5000여발을 춘천 사범학교로 모두 옮겨 포탄이 북한군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막았다. 주민들은 또 청년단, 부녀회 등을 조직해서 주먹밥을 싸가지고 군인들을 먹였다.

국방부 관계자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여러 차례 국지전을 치르면서 당시 김정호 춘천 6사단장은 대비를 철저히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포병훈련을 얼마나 호되게 시켰던지 불평불만이 터져나왔고, 심지어 16포병대 군의관까지 포를 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갖췄다”고 설명했다.

당시 21세의 나이로 국군1기생 육사단 8연대 1세대에 입대해 전쟁을 치른 참전용사 황기중 옹은 “소양강 물이 피바다가 될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또 “처음에는 북한군이 춘천으로만 들어오는 줄 알았다. 그래서 지원군만 오면 금방 소멸시킬 수 있을 줄 알았고, 사력을 다해 지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황 옹은 “춘천에서 3일간을 못 버텼으면 전쟁 초반부터 수도 서울이 영원히 함락됐을지도 모른다. 북한이 3일간이나 소양교를 못 건넌 데는 국군도 잘 싸웠지만 어린 고등학생과 학도병, 피난보따리를 내던지고 거들어준 주민들이 있어서였다”고 전했다.

20세의 나이로 전쟁을 치렀던 안원흥 옹은 “당시 3일간은 지금과 같은 평범한 3일이 아니었다”는 말로 지난 전쟁을 회고했다. 안 옹은 “춘천을 먼저 점령해 수도권을 포위하려던 북한군이 첫 지역인 춘천에서 발이 묶이면서 계획이 무산됐다. 이 기간동안 국군이 낙동강방어선을 기점으로 다시 북으로 밀고 올라갈 수 있었던 기반이 마련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황기중 옹과 안원흥 옹이 속했던 6사단은 춘천에서 전략상 후퇴한 이후 한때 전세가 밀려 청주, 문경을 지나 낙동강방어선까지 후퇴했다. 하지만 다시 강진, 춘천을 지나 평양, 함경북도까지 밀고 올라가 압록강 물을 가장 먼저 수통에 담아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했던 부대이기도 했다.

28일 수원비행장에 내린 맥아더 장군은 곧바로 한강방어선을 시찰했다고 한다. 거기서 만난 한 국군 병사에게 맥아더는 ‘당신은 언제까지 이 전선을 지킬 계획이냐’고 물었고, 이 병사는 ‘진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맥아더는 이 병사의 말 한마디에 전쟁 의지를 더욱 불태울 수 있었던 것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제 춘천지구전투에 참가했다가 살아남아 증언할 참전용사들은 10명도 채 안된다. 80대 중반을 넘긴 두 참전용사들은 “지금부터 60여년 전 지구상에 대한민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젊디 젊은 유엔군 5만명이 이 땅에서 자유민주를 수호하려다가 죽어갔다. 당시 미군만 3만5000명이었다고 하니 우리 산천에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를 뿌려서 얻은 것이 지금 자유 대한민국이다”라며 마지막 소회를 풀었다.

김소정 기자 (bright@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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