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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희 "최루탄 이어 핵폭탄 나올까 무섭다"

김현 기자 (hyun1027@ebn.co.kr)
입력 2012.09.12 11:24 수정

<인터뷰>19대 개원후 취임 70여일 맞은 강창희 국회의장

"사막을 건너는 것은 용맹한 사자가 아니라 우직한 낙타"

강창희 국회의장.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강창희 국회의장.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데일리안>이 최근 국회 의장실에서 만난 강창희 국회의장은 호탕하면서,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다. 글자체에서조차 그의 성격이 그대로 묻어났다.

과거 충청권의 맹주였던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가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정부’ 당시 내각제 개헌을 연기키로 마음먹자 강 의장은 반기를 들었고, 김 전 총재는 그를 “스트레이트적 인간”이라고 불렀다. 요즘 말로, 변화구를 모르는 ‘돌직구 투수’였던 셈이다. 강 의장은 2000년 말 김 전 총재의 ‘의원 꿔오기’에 끝까지 반대했다. 결국 자민련에서 제명당했지만, 그는 자신의 소신을 꺾지 않았다.

‘직선적 인간’인 강 의장은 자신의 인생이나 정치행보를 ‘낙타’에 비유하곤 한다. “사막을 건너는 것은 용맹스러운 사자나 호랑이도, 덩치 큰 코끼리나 몸이 빠른 사슴, 토끼가 아니라 우직한 낙타”라는 게 강 의장의 얘기다. ‘참고 기다리며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그의 철학이 배어 있는 것이다. 12대 총선부터 19대 총선까지 8번이나 대전 중구에서만 출마한 그의 끈질김도 그의 ‘낙타론’에 근간한 것으로 보인다.

강 의장의 낙타론은 국회의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데서도 이어지고 있다. 강 의장은 지난 7월 2일 19대 국회 개원사에서 “사막을 건너는 것은 용맹한 사자가 아니라 우직한 낙타”라며 “우직한 낙타처럼 헌법과 법률 그리고 국민의 상식을 나침반으로 삼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가자”고 했다.

강 의장은 인터뷰 중간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 한수를 읊었다. 낙타론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됐지만, 또 다른 여운이 남는 시였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저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저 혼자서 둥글어 질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 볕 두어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그는 “내가 성격이 급하긴 하지만, 참고 기다렸다”며 “내가 8년(17~18대 총선 낙선)을 기다려서 여기까지 온 거다. 내가 못 기다리고, 못 참았다면 국회의장이고 뭐고, 국회의원이나 됐겠느냐”라고 했다.

다음은 강 의장과의 일문일답.

- 육사 25기인데.

“나는 1965년에 입학해서 1969년에 졸업했다. 그러니까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다. 당시 육사가 있던 태릉은 완전 시골로, 허허벌판이었다. 당시는 태릉선수촌도 없었고, 서울여대가 막 개교를 했었다. 당시 인근의 삼육대에서 우유를 팔기 시작했다. 사관학교 운동선수들에게 우유를 공급해 그 때 내가 생우유를 처음 먹어봤다. 당시는 거의 분유 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구호물자 중 큰 드럼통 같은 종이박스에 분유를 담아 학교에서 배급을 줬다. 집에서 자루를 갖고 와서 학생들이 배급을 받았다. 6.25 직후라 영양 상태가 정말 안 좋았다. 우리가 졸업하고 나니 태릉선수촌이 들어오더라. 그 전엔 태릉이 참 러프하기도 했지만 운치가 있었다.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기합 받을 때 ‘불암산 선착순’ 하곤 했다. 인근에 배가 많아서 이맘 때 쯤엔 배를 많이 먹었던 것 같다.”

- 배서리도 했나?

“하하하. 내가 그래도 사관생도인데, 배서리를 했겠느냐.”

- 추억이 많겠다.

“인근에 봉화산 뒤쪽으로 한독약품이 있었다. 월요일마다 수업이 끝나면 완전군장을 하고 구보를 했다. 봉화산하고 한독약품을 돌아서 육사로 오는 코스인데, 한 8~10km 정도 거리인데 2시간 정도 걸렸다. 나는 운동을 잘 해 뜀박질을 잘했다. 체질적으로 구보를 못하는 애들이 있다. 그 친구들은 시작부터 헉헉댄다. 그러면 나는 총 매주고 그랬다. 총 하나 더 매면 엄청 무거웠다. 당시 중대별로 가는데, 황진하 송영근 새누리당 의원이 같은 중대였다.”

- 의리의 사나이였다?

“하하하.”

- 육사에서 축구부 주장을 했던데?

“나는 축구 잘했다. 대표선수 수준의 선수였다. 김호, 김정남, 이회택 다 같이 공 찼다. 군대 축구지만, 4년 동안 베스트 멤버로 풀로 뛰었다. 한 때 축구선수를 할까 생각했었다. 수비, 공격, 미드필더 등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다.”

강창희 국회의장.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강창희 국회의장.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 하나회 활동도 했던데?

“축구부 활동 당시 공수단 부단장으로 있던 전두환 소령이 낙하훈련 때 받은 생명수당을 모아 축구부에 빵과 불고기를 자주 사주면서 알게 됐다. 전 전 대통령이 내 정치의 멘토 아니냐고 하는데, 멘토 아니다. 나를 정치에 입문시켜 준 사람이기도 하고, 성격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고 그런 것일 뿐이다. 내가 부관 출신이라는 얘기도 있던데 나는 한번도 같은 부대에서 근무한 적이 없다. 내가 (2사단에서 근무하다) 청와대 30경비단으로 갔는데, 거기가 하나회 본산이다. 거기서 소대장, 중대장 했더니 자동적으로 하나회가 됐다. 하나회인지도 군대에서 나와서 알았다.”

- 1986년 최저임금법을 만들었던데.

“그 때 막 노사분규가 시작됐다. 이러다간 큰 일 나겠다는 위기감이 들더라. 그 때가 김문수, 손학규 등 전부 노동운동 할 때다. 내가 11대 국회의원 당시 보사위원회(보건사회부, 노동부, 환경청) 소속이었다. 당시 의료보험법과 노동관계법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던 때다. 그 때 민정당 전국구 의원이던 김종인 의원은 산별노조에 대해 안 된다면서 기업별 노조로 가야 한다고 하더라. 그 때 난 산별노조고 뭐고 잘 모를 때였다.

이헌기 전 노동부 장관이 11대 국회에서 전국구 의원했을 때 보사위원회를 같이 했다. 그 때 그 분한테 노동문제를 많이 배웠다. 이 전 장관이 장관되기 전 나에게 ‘최저임금법이 꼭 있어야 한다’고 하더라. 당시 구로공단, 전자부품회사, 신발산업 전부 월급이 10만원 미만이었다. 특히 여직공들은 더 그랬다. 이 장관은 ‘10만원 미만의 저임금은 없애야 한다. 이걸 놔두면 나중에 큰 문제가 생긴다. 노동운동이 큰 재앙으로 번질 수 있으니 꼭 만들어야 한다’고 나에게 가르쳐 줬다.

12대 때 내가 보사위 간사돼서 (최저임금법을) 시작했다. 당시 이헌기 의원은 노동부장관 됐고, 둘이 죽이 맞아서 했다. 그 땐 주로 정부 입법이다. 의원들이 법을 만들 능력이 없었다. 보좌진도 약하지, 입법조사처도 지금처럼 없었다. 그래서 특별한 게 아니면 의원입법은 생각을 못할 때다. 전부 정부 입법이었다. 그런데 당시 이헌기 장관이 생각하니 청와대, 경제기획원 등이 다 반대하니 정부 입법으로는 최저임금법을 만들 수 없었던 거다. 그래서 나한테 의원입법을 하라고 아이디어를 준 거다. 그래서 최저임금법이 시작됐다.

그 때 싸우기 시작한 게 누구냐면 강봉균 전 민주당 의원, 진념 전 재경부 장관 등이다. 당시 두 사람 다 경제기획원에 있었다. ‘시기상조’라고 하더라. 그래도 거기는 내가 국회의원이니 찍어 눌렀다. 당시 당 정책위의장이 장성만 전 국회부의장이었는데, 최저임금법을 설명했더니 찬성하더라. 그래서 보사위에 올렸다. 정부가 반대를 해야 하는데, 노동부 장관이 이 장관이니 그대로 보사위에서 통과해 법사위로 넘어간 거다. 그런데 법사위에서 난리가 났다. 당시 이한동 원내총무가 ‘정부에서 반대한다’고 하더라. 당시 김만제 경제기획원 장관, 사공일 청와대 경제수석이 반대한다고 그랬던 모양이더라. 거기서 진전이 안 됐다.

제일 문제가 된 것은 통상 임금협상을 매년하기 때문에 ‘최저 임금은 매년 결정한다’고 안을 냈는데, 경제기획원 등에선 ‘최저 임금은 필요에 따라 결정한다’고 해달라고 하더라. 내가 ‘그건 안 한다는 것 아니냐’고 해서 안 된다고 거부했다. 이한동 원내총무가 나보고 해결하라고 해서 당시 당 대표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까지 다 보고했다. 노 전 대통령도 정확히 잘 모르니 그냥 넘어갔는데, 사 수석이 제동을 걸더라. 그래서 사 수석을 만나러 갔다. 나도 몇 달을 끌어왔으니 거기에 대해선 상당히 연구가 됐었다. 사 수석은 ‘선진국이 눈앞에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주춤거려선 안 된다. 일단 거기까지 가고 나서 노동문제를 해결하자. 시기가 너무 빠르다’고 하더라. 나는 ‘이 보따리를 끌고 거기까지 갈 수 있으면 좋은데 중간에 터져버릴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주워 매서 가던지. 잘 묶어서 매서 가야 하지 안 그러면 못 간다’고 반박했다.

내가 계속 고집 부리니 사 수석이 ‘이건 일본의 춘투처럼 매년 노동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경제적인 문제의 관점이 아니라 정치 관점에서 얘기하는 것’이라고 하더라. 그걸 내가 말꼬리로 잡았다. ‘그러냐. 나는 경제적인 문제가 될 것이라 생각해서 경제수석하고 얘기했는데, 그러면 정무수석한테 가겠다’고 짐을 싸서 나왔다. 당시 정무 수석이 허주 김윤환 전 의원이었다. 거기서 내가 어깃장을 부린 거다. 사 수석이 다시 들어오라 하더니 “강 의원도 젊고 나도 젊은데 이건 더 두고 보자”라고 그러더라. 그래서 3~4개월 만에 통과가 됐다. 정확한 기억은 없는데, 1986년 말에 법안이 통과되고 첫 번째 최저임금이 11만 7000원이 됐다. 그래서 10만원 미만의 저임금 지대를 없앴다. 이 장관이 노동부 장관이 아니었으면 못했다. 그 분이 노동운동가였고, 공부도 많이 했던 분이다. 겉으로는 반대하는 척 하면서 속으론 다 도와줬다. 그래서 그 법이 된 거다.”

강창희 국회의장.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강창희 국회의장.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 낙타론을 강조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좀 조급하다. 뭔가 끈질기게 기다릴 줄 모른다. 나도 물론 상당히 성격이 급한 사람이긴 하다. 그래서 내가 ‘대추 한알’이라는 시를 좋아한다. 낙타 얘기는 원래 결혼식 주례를 서 달라 하길래 한 거였다. 결혼이라는 게 굉장히 끈기가 필요하다. 요새 이혼율이 얼마나 높으냐. 결혼식 주례를 서면서 꼭 하는 얘기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된다.

그래서 사막을 건너는 것은 용맹스러운 사자나 호랑이도, 덩치가 큰 코끼리도, 몸이 빠른 사슴이나 토끼도 아니고 우직한 낙타’라는 얘기다. 인생은 또 마라톤과 같은 것이다. 출발점을 먼저 출발했다고, 반환점을 먼저 돌았다고 승리하는 게 아니라 결승점에 먼저 들어온 게 우승하는 사람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끈기있게 가야 한다. 그게 낙타론이다.”

- 낙타론이 의장직 수행에 적합한 것 같다.

“나는 대전 중구에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12대부터 19대 총선까지 8번 선거를 치렀다. 그 결과 3번 낙선하고 5번 승리했다. 내가 성격이 급하지만, 참고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8년을 기다려서 여기까지 온 거다. 내가 못 기다리고, 못 참았으면 의장이고 뭐고, 국회의원이나 됐겠느냐. 일부에선 스트레이트로 당선된 사람들을 존경하지만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중간 중간 낙선을 경험해봐야 당선의 맛과 묘미를 안다.

특히 17대와 18대 총선에서 연거푸 낙선해서 있으면서 국민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18대 국회를 본 국민들의 바람은 ‘싸움하지 말라’는 거더라. ‘애들 보기 부끄럽다’는 거 아니냐. 그래서 나는 싸움을 안하는 국회를 만들 거다. 싸움 안하는 국회를 만들려면 원칙대로 해야 한다. 그래야 의장이 할 말을 할 수 있다. 내가 왔다 갔다 하면 말을 듣겠느냐. 내가 원칙대로 해 가면 제재가 가능하다. 그래야 명분이 있다는 거다.

지난 번 총리해임안이 들어왔을 때 야당에서 ‘해달라’고 하고, 여당에선 ‘설마 하겠어? 옛날처럼 시간 질질 끌어서 보내주겠지’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라. 박기춘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가 와서 ‘하자’고 해서 ‘합시다’라고 했다. 곧바로 김기춘 새누리당 원내수석이 쫓아왔더라. 내가 무마하고 해임건의안을 직권 상정했다. 결국은 그래서 그 사안이 해결됐다. 인사에 관한 안건은 24시간 이후 72시간 이내에 처리하도록 국회법에 시한이 정해져 있다. 만일 내가 그 때 그렇게 안 했다면 앞으로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야당에서 ‘안 해주느냐’고 해서 의장실 점거하고 그 꼴이 날 거다.

그게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겠지만,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 체포동의안이 왔을 때 박 원내대표도 답답했을 거다. 내 성격 봐선 방방 뜰 것 같으니 (민주당측에서) 여러 관점으로 물어보더라. 나는 ‘총리 해임안도 하지 않았느냐. 그것도 해야지 어떡하느냐’ 했다. 결국 (박 원내대표가 자진 출석을 했는데) 거기에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본다.”

- 이번 정기국회는 대선을 앞두고 있어 자칫 민생국회가 아닌 정쟁 국회가 될 가능성이 높은데?

“정치쟁점이 있는 사안은 제로섬 게임이기 때문에 정말 처리하기 어렵다. 일단 민생국회는 여론의 힘을 빌려야 한다. 나도 최대한 노력하지만, 언론을 통해 여론을 옳고 그름으로 정확하게 판가름하게 되면 다 손을 든다. 대표적인 게 김병화 대법관 사안이다. 새누리당에서 ‘강행처리 해달라’ 했는데, 시간을 끌으니 여론이 변해가더라. 그러니 새누리당에서도 어쩔 수 없었던 거다. 언론이 여론을 잘 환기시켜 주는 게 중요하다. 정치쟁점이 있는 것은 끝까지 시간을 끌 것이다.”

- 세비 인상을 두고 논란이 많은데

“우리는 잘 몰랐다. 정말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보고를 받아봤다. 국회의원 세비가 IMF 때 동결됐더라. 그런데 지금 국회의원은 예우가 장관급 예우로 하게 돼 있다. 보수도 장관급과 같아야 하는데 2010년을 기준으로 2000만원이나 적고, 차관보다는 200만원 적다. 그래서 장관급과 동일하게 예우하기 위해 올렸다는 거다. 문제는 이게 18대 국회 때 2011년 말 예산안에서 올린 거라 우리가 알 턱이 있느냐. 당시 박희태 국회의장과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그런 거다. 그래서 19대 의원들은 알지도 모르고 누명만 쓴 거다.”

- 일반 국민들은 국회의원들이 하는 일에 비해서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것은 일 안 하는 것 때문에 그런 거다. 하지만 이쪽도 논리가 있다. 무작정 올린 게 아니다. 다만 왜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처리했느냐는 것은 지탄받아야 할 것으로 본다.”

강창희 국회의장.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강창희 국회의장.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 국회의원의 불체포 특권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불체포 특권은 과거 민주화 되기 이전 자유당 때고 그 이후고 야당 의원들을 막 잡아가니 ‘도저히 안 되겠다’고 해서 국회의원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만든 것이다. 당시 국회의원들은 아주 약한 존재였다. 입도 뻥끗 못했다. 국회의원이라고 뽑아놓고서 정부 여당에 반대하는 말을 하면 잡아가니 만들었을 것인데, 지금은 이게 특권이 돼버렸다. 그 때는 정치적 사건 때문에 체포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소위 입 때문에 그런 것인데, 지금은 돈 때문에 그런다. 그래서 국민들로부터 지탄받으니 스스로 다 내려놓겠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체포동의안이 올라오면 의결해주는 게 특권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나는 해야 된다고 본다.”

-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이 항상 문제다. 일각에선 이른바 ‘오세훈 선거법’에 대한 개정 필요성을 주장하는데?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16대 국회 말에 그 법안을 만들 때 이미 자신은 17대 총선에 출마를 안 하겠다는 결심이 섰었다. 그래서 자신은 ‘상관없다’고 생각한 거다. 아마 자신도 ‘다음에 또 국회의원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면 상당한 고려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당을 없앤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지구당에 이사람 저사람 두면 인건비 때문에 견딜 수 없다. 해보면 한 사람만 두면 된다. 그런데 법적으로 지구당을 용인하지 않으니 대부분 다 편법으로 하고 있다다. 왜 국회의원이나 정치 지망생들에게 편법과 불법을을 강요하느냐. 지구당을 부활해야 한다. 후원회도 그렇다. 법인들의 후원을 못하게 하는 것은 좋다. 그런데 법인을 못하게 하니 자꾸 로비성 돈이 후원회로 들어간다. 돈을 쓰는 것도 그렇고 너무 엄격하게 제한돼 있다. 엄격하게 하는 것도 좋지만, 너무 불합리하게 막아놔선 곤란하다. 소액다수가 좋은데, 후원회도 못하게 한다는 건 문제다.”

- 지금은 출판기념회를 많이 하는 것 같다.

“그것은 편법이다. 그러지 말고 후원회를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 대선을 앞두고 여야의 대선주자들이 개헌에 대한 견해들을 내놓고 있는데?

“나도 개인적으로는 개헌의 필요성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밝히지 못하지만 이렇게 저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시점은 이명박 정부의 말기고 개헌은 현 정부에서 할 수 없다. 차기 정부에서 할 일이다. 아직 차기 정부가 결정이 안됐으니 그 때까지 기다려 보겠다. 물론 개헌은 차기 정부나 국회만으로도 안 된다. 발의는 국회도, 대통령도 할 수 있지만, 국회에서 2/3로 통과돼야 하고, 국민투표도 붙여져야 한다. 협의해서 협조하에 할 수 있는 과제다. 차기 정부와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든 간에 그 정부와 빠른 시간 내에 협의해서 (개헌을) 하겠다.”

-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으로 한일간 외교갈등이 심각하다. 의원외교 차원에서 준비하는 게 있나.

“‘정부 대 정부’간은 자존심 등으로 풀지 못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의원들이 부드럽게 풀 수 있다는 데서 의원외교의 중요성이 있다. 나는 한일관계도 그렇게 본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냉각됐다. 나도 일본을 들러 상하원 의장도 만나려고 했는데 지금은 딱 막혀버렸다. 워낙 감정이 격해 있어 지금은 우리가 뚫고 들어간다고 해서 되지 않는다. 금년은 지나야 한다고 본다. 부부싸움을 감정적으로 했는데 화해하자고 한다고 해서 되겠느냐. 시간이 지나야 된다.”

- 연말 대선의 시대정신은 무엇이라고 보나.

“지금은 사람들이 너무 믿질 않는다. 믿을 수가 없다. 요새 보면 전부 자기 운전기사들이 카메라로 찍고, 보좌진들이 메모해서 고발하지 않느냐. 어떤 사람을 믿고 사느냐. 이 시대의 가장 큰 가치는 믿음이고 신뢰다. 너무 신뢰가 무너졌다.

아울러 요즘 얘기되는 경제민주화도 그 요체는 경제적인 페어플레이라고 본다. 뭘 하더라도 정정당당히 하라는 거다. 나는 경제학자가 아니라 경제민주화의 견해가 뚜렷한 것도 아니고 이론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내가 느끼는 경제민주화의 개념은 공정경쟁을 하고, 재벌이라고 해서 자신들 마음대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경제적인 페어플레이가 경제민주화의 제1의 가치라고 본다.”

- 경제민주화가 재벌 때리기로 비쳐지는 측면이 있는데.

“그러면 우리나라 경제가 버텨나겠느냐. 재벌, 대기업도 좀 자숙하라는 것 아니겠느냐.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가진 사람이 양보, 배려하고 등 두들겨 주면 왜 싸움이 되겠느냐. 그냥 자기가 다 독식하려고 하니 국민들이 저항하고 밑에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는 거다. 재벌들도 변해야 한다. 나는 경제학자가 아니니 잘 모르지만, 그렇다고 (지배)체제를 바꾸는 것보단 경제적인 노블리스 오블리주, 페어플레이가 경제민주화의 요체라고 본다.”

- 이른바 안철수 현상이 정당정치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기성 정치인들이 잘못해서 그런 것 아니겠느냐. 이제 반성해야 한다. 그런데 정치에 대한 불신은 한국만 있는 게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고 세계 어느 나라든 다 그렇다고 하더라. 미국엔 ‘공화당 의원과 민주당 의원이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떨어지면 누가 살았겠느냐. 국민만 살았다’는 조크가 있다고 한다. 거기도 얼마나 정치 불신이 있느냐.”

- 의장 임기 중 꼭 달성하고 싶은 일이나 목표가 있나.

“싸움 안하고 무사히 넘어갔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큰 진전이라고 본다. 민생국회는 국회의 기본 임무다. 지금까진 그걸 제쳐 두고 맨 싸움만 해서 그런 거다. 과거에도 몸싸움이 있었지만, 그땐 끝나면 평상으로 돌아가 같이 대화하고 밥도 먹고, 술 마시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예 안 만난다. 그게 문제다. 만나질 않으니까 감정이 자꾸 누적되고 그런다.

한쪽에서 ‘너 그 때 그랬지’ 해서 싸우고 그런다. 그러다 보니 싸움의 방법도 변증법적으로 발전해서 처음엔 뭐 하다가, 나중에 뛰어올랐다가 뛰어다니다가, 그 나중엔 문 잠그고 하다가 나중엔 전기톱으로 자르고, 망치 가져다 문 부스고 나중엔 최루탄까지 가게 된 거다. 잘못하면 핵폭탄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이다.”[데일리안 = 대담 이의춘 편집국장 / 정리 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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